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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끼 손가락 없는 오토맨.


BY happy4746 2003-05-07

"종철이 바꿔라"
"아빠 전화"

내가 고딩 딱지를 때기전까지 이 음성에 참 익숙해 있었다.
벌써 15년전 이야기지만...

아버지의 캐릭터를 분석하자면, 공과금 밀리면 안되고, 할부 안 하셨고, 아침 반야심경이나 금강경 테입을 크게 켜 놓고 딸들을 깨웠고,
콧물을 휴지 없이 쓱 닦아 두 손바닥으로 비벼 말려 없앴고, 고추장만 있어도 밥 한그릇을 아주 맛있게 드셨고, 직업의 특성상 비오는 날이면 일을 하지 못하고 집에서 당신이 쓰던 펜찌와 드라이버와 공구들을 모조리 기름 칠 해 고양이 세수하는 아버지의 얼굴 보다 더 윤기나게 만들어 놓으셨다.
전기쟁이..
난 전기쟁이 딸..

한창 맥가이버가 판을 칠때 난 우리 아버지가 맥가이버인 줄 알았다.
상도 만들고, 서랍장도 만들고, 액자도 만들고, 하물며 하수도에 지붕수리까지 우리 아버지 손만 닿으면 쓸모 없는 것들이 쓸모 있게 되고,귀한 물건이 된다.
특히 전기!
우리집은 물건을 콘센트로 가지고 가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콘센트를 물건 있는 쪽으로 옮겨 달았었다.
완전히 고정 관념을 벗어난 필수품 이었다.

저녁이면 한분한분 우리집으로 아버지 친구들의 부부동반 모임이 시작 된다.
사남매는 다락방으로 꿈을 키우러 간다.
티비도 다락방에 옮겨지고, 먹거리도 엄마가 배달을 하신다.
곧 지금의 비디오 테잎과 흡사한 테잎을 넣으면 전축에서 지루박이 흘러 오고, 아줌마 아저씨의 흥겨운 밤의 시간이 예정 돼 있었다.
잘때는 분명 다락 이었는데, 아침에 눈을 뜨면 온전한 내방이다.

지금도 난 내 아버지를 존경 할 수 밖에 없는 것은 우리 엄마를 팔 베개해서 재웠다는 것이다.
난 모든 남자가 아버지처럼 그렇게 하는 줄 알았다.
안방에 티비가 있었기 때문에 식구가 오글오글 한방에서 붙어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아버지와 엄마는 주무시고, 나와 동생들은 늦은 시간 외화나 드라마를 봤는데,
특히 아버지는 외화를 싫어해서 "나중에 미국놈 하고 시집 갈래!"
하며 큰 소리로 호통을 치셨다.
물론 우리도 "응" 이라고 부화를 더 치밀게 했지만, 여전히 엄마의 머리를 받치고 있는 팔은 그대로 였다.

사춘기 땐 그 또한 에로티즘으로 보여 보기 싫은 적도 있었지만...
지금 생각하니 아무나 할 수 있는 행동은 아니듯 싶다.

꿈의 시절.
비오는 날이면 처마 밑에 앉아 빗소리가 좋아 청승을 떨고 있으면,
어느새 나가 만두와 떡복기와 오뎅을 사가지고 오셔서 "맛있다 먹어봐"
그리고 씩 웃던 아버지의 얼굴.
책 읽는 모습만 보면 좋아서 다음날 용돈의 양이 달라지고, 뽀뽀의 횟수가 부쩍 늘고, 그런 딸을 무척 자랑스러워 하셨던 분.

세끼 손가락이 없어 항상 목장갑의 새끼는 제가 들어갈 곳을 찾지 못하고 약지 사이로 끼어 들기를 했고, 행여 세끼가 다시 나오지 않을까
싶어 손가락 운동을 열심히 하셨던 분.

그리고 125의 오토바이에 아버지의 몸은 할리데이비스를 탄 유명 배우보다 더 멋있는 폼으로 시동을 걸며, 발진을 했다.
분명 아버지는 자신이 최무룡 정도의 멋진 사내라고 생각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97년 겨울. 전기쟁이가 최후를 맞던 날이다.
눈이 많이 오던 날 아버지는 전봇대를 오르셨고, 거기서 다시는 돌아오지 못 할 길을 가신 거다.
희극처럼 살았으면서, 희극의 마지막 장면처럼 아직 할 일도 많은데
혼자 유유히 하늘을 향해 가신 거다.

난 그 전날 손녀딸과의 대화를 잊지 못한다.
장난끼 있는 목소리로 "우리 애기여. 우리 애기 뭣 사줄까?"
아직 16개월 밖에 안 된 애기를 보고...

보고 싶다...우리 아버지가....

다연이는 지금 9살이지만, 우리 아버지는 여전히 우리 애기로 알고 있을 텐데..

아니지 더 잘 알고 계시겠지만...

나도 카네이션 달아 줄 아버지가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