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감으면 어디선가
바람을 뒤따라 온 흙냄새도 나고
박쥐들의 날개 짓도 들리는 듯 하다.
해질 녘 어스름한 저녁
떼 지어 날던 박쥐들의 모습을
지금은 찾아 볼 수가 없다.
아마 박쥐들도 핵가족 되어
나처럼 아파트 속에서 갇혀 살고 있나보다.
나 어릴 때 막내 외삼촌은
우리 집하고 늘 한동네에서 함께 살았다.
외삼촌에게는 딸만 넷.
결국엔 그 뒤로 딸 하나를 더 두고
아들을 두었지만 당시엔 딸만 넷을 두었다.
우리 집엔 오빠와 딸만 셋이니
외삼촌댁과 우리 집이 모이면 딸만 일곱인
칠공주파 아닌 칠공주가 되었다.
그중 가장 나이 많은 난 언제나
칠공주의 왕 언니 노릇을 할 수 밖에.
가까이 사는 외삼촌댁 식구들은
이른 저녁을 먹고는 늘 우리 집으로 놀러오셨다.
한 여름 밤이면 옥상에 올라와
어스름한 저녁 하늘을 날던 박쥐이야기며
별자리 얘기며, 무서운 귀신이야기까지 해주시던
외삼촌은 오늘날의 인터넷 같은 존재였으리라.
그 좁은 집에서 어른 아이들 모이면 정신이 없다.
그러면 아버지께서는 큰딸인 나를
마치 대대장 부르듯 부르신다.
"얘들 데리고 밖에 나가 놀아라!"
쫄랑쫄랑 따라오는 여섯이나 되는
동생들을 이끌고 문 앞 골목길로 나온다.
놀이기구 하나 없는 골목길에서도
우린 너무나도 놀 것들이 참 많다.
고무줄놀이. 소꿉놀이. 술래잡기.
색깔 찾기. 땅따먹기. 공기놀이.
우린 그렇게 갖은 놀이로
엄마가 찾아 부를 때 까지 놀이에 빠져든다.
비가 오면 방안의 노란 비닐장판에
작은 원과 선을 그리곤 삔 치기를 한다.
그러다 지루하면 종이로 된 인형놀이에도 열중한다.
예쁘게 그리고, 색칠하고, 오리고, 입히고.
마치 책갈피가 옷장인양
인형 옷들을 하나씩 정성껏 꽂아 둔다.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던 난
여섯 명이나 되는 동생들에게
공주와 왕자 그림을 그려주면
순간 난 일곱 난장이의 백설 공주라도 된 양
동생들의 시선과 부러움을 한 몸에 받는다.
"언니야~그림 너무 예쁘다~
학교에 가지고 가서 자랑해야지~"
막내 외삼촌은 언제나 짖궂기만 했다.
삐쩍 마른 나의 팔목을 아프게 잡고는
놓아주질 않으셨고
내가 가장 듣기 싫어하는
별명을 부르며 혼자 재밌어 하셨다.
"외삼촌 미워~"
그러면서 외삼촌을 따랐던 나.
어른들은 외삼촌의 막내딸을 못난이라 불렀다.
그러던 어느 날 막내딸 못난이가 옥상에서 놀다가
그만 떨어지는 사고가 났었지만
어른들 말씀대로 삼신할머니가 도우셨는지
다행히도 상처 하나 없이 멀쩡했다.
옥상에서 떨어진 외삼촌의 막내딸.
그래서 생긴 못난이의 또 다른 별명은 바로 옥떨메..
지금도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추억의 별명이다.
그렇게 짖궂고 장난스럽던 외삼촌은
어느덧 세월이 흘러 벌써 환갑을 훌쩍 넘기셨고,
우리 칠 공주들은 어느덧 결혼해서
아이들 키우며 알콩 달콩 살고 있다.
못난이 옥떨메는 지금은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콧대 높은
예쁜 노처녀가 되어 멋진 신랑감을 찾고 있다.
그 예전 공주그림을 그려 달라고
앞 다퉈 조르던 여섯 동생들은 다들 어디로 가고
지금은 어린 막내 딸아이만 내 곁에 남아
그때 그 어린 동생들처럼 좋아라한다.
왕관을 그리고, 풍성한 드레스를 그리고
그 촌스런 그림을 보고 좋아하는 막내딸을 보며.
예전생각에 혼자 빙긋이 웃어본다.
계절은 이렇게 단 한번도
변하지 않고 또 오고 가는데
사람은 한번 변하면 되돌아오지 못하는
현실이 때론 마냥 서럽기까지 하다.
세월은 흐르고 흘러
그 예전과 똑같은 봄이 또 이렇게 찾아왔건만
떼 지어 날던 박쥐들도 사라지고
소설 같은 별자리 이야기도 잊혀지고
무서운 이야길 들어도 이젠 무섭지 않으니.
이젠 그저 키 작은 슬라브 집 옥상의 추억과
골목길에서 함께 어울려 놀던 칠 공주들의 함성만
귓전에 살랑일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