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과 함께 도착한 이태원의 대학병원... 그 때는 의사들 파업기간이었다. 다행히 교수님들은 근무를 하고 계셨기에 급하게 진단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의사선생님의 입에서 나온 말은 더욱 기가 막힌 말이었다. '양수가 한방울도 없네요... 거기다 완전 전치태반이네... 수술을 해야 할 것 같아요'
그리고 덧붙인 설명들... '양수가 없으니 아이가 자랄 수가 없다. 아이가 지금 살아있느니 당장 수술을 할 수는 없다. 아이가 더 견딜수가 없어 진통이 오면 수술을 해야 한다. 완전전치태반이라 유도분만을 할 수도 없다. 그러니 재왕절개를 해야한다. 전치태반의 경우 재왕절개 수술을 하면 하혈이 많을 수 있다. 하혈이 멈추지 않으면 자궁을 적출해야 한다. 전치태반이란 태반이 자궁입구를 가리고 있는 형태를 말하는데 보통 태반은 자궁입구를 가리고 있으니 자연분만을 할수가 없다. 더구나 개월수보다 앞서 조산을 하는 경우 태반이 자궁에서 분리될 준비가 덜 되어 있어 태반을 자궁에서 억지로 뜯어내야 한다. 그러는 과정에서 과다한 출혈이 있을 수 있고 출혈이 멈추지 않을 경우 생명이 위태롭다. 수혈로는 감당할 수 없어 자궁을 드러내야 한다. 참 어려운 상황이다.' ....
의사의 설명을 들은 나는 남편을 불들고 울었다. 더 끔찍한 일이었다. 사람의 마음이 참 간사하다 생각되었다. 아기의 안녕도 그렇지만 우선 겁부터 더럭 들었다. 혹 내가 죽게 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의사의 설명이 충분히 그랬으니까. 그리고 이 아이가 잘못되더라도 다시 아이를 가질 수 있는 희망이 없었다. 의사의 말로는 나의 상태가 거의 그런 수순을 밟게 될 것이라고 했다. 이젠 겁이 나기 시작했다.
간호사의 위로가 있기 전까지 난 절망했다. 간호사 선생님이 내게 위로의 말을 해주었다. 의사선생님은 최악의 경우를 말씀하시는거라고... 이제부턴 산모와 아이가 함께 이겨나가는 것이라고... 용기를 주는 간호사의 말에 나도 안정을 찾아갔다.
남편은 거듭 의사에게 물었다. '도대체 양수를 넣을 수는 없는 거냐고...그리고 양수를 더이상 새지 않게 할 수는 없냐고.. 또 양수가 생기게 하는 방법은 없냐고..' 의사는 없다고 했다. 그런 방법은 없다고...
나는 그 병원에 그렇게 일주일을 누워있었다. 화장실을 가지도 말고 침대위에서만 있으라고 했다. 남편은 서버의 불안정 땜에 무척 바빴다. 그래도 매일 내게 들러주었다. 늦은 밤에도 맛난 음식을 사들고 왔다. 친정엄마가 무척 힘들어 하셨다. 아줌마닷컴에서 만난 친구들, 언니들이 찾아왔다. 시댁식구, 친정식구들도 병문안을 왔다. 그래도 혼자있는 시간이 많았다.
병원에서 나오는 식사를 하면서... 밥 한숟가락, 반찬 한젓가락을 먹어도 아기를 생각하며 먹었다. 우유 하잔을 마셔도 '양수가 생겨라, 양수야 생겨라' 주문을 외었다. 무엇이든 먹을 때면 주문을 외었다. '먹는 것 모두 아이에게 가라', '양수야 생겨라' 그러다간 눈물이 났다. 이토록 마음을 한곳에 모아 소망한 것이 있었던가? 임신 기간 동안 이렇게 절실하게 아기를 위해 식사를 하고 아기를 위해 생각하고 했던 적이 없었다. 책에서 그랬었지. 식사를 하더라고 아기를 생각하며 영양을 고루 섭취하라고... 난 너무도 무심한 엄마였다.
병원에 들어간지 5일이 지났다. 내가 있던 대학병원이 공사를 시작했다. 병원에선 항생제를 놓아주고 링거를 꽂아준 것 이외에 아무 대책도 없다. 단지 양수가 없는 상태에서 아이가 오래 있다보면 움직이질 못해 다리나 팔이 휘는 기형이 생길 수 있다는 말 밖에... 다른 어떤 방법도 없이 그저 내가 진통이 오는지 더이상 밑으로 새는 것은 없는지만 체크할 뿐...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난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공사를 시작한 병원은 혼란스러웠다. 매일 밤 낮으로 바로 옆 침대에서는 분만의 고통으로 신음하는 산모들의 소리가 들려왔다. 시트위로 불룩하게 솟아오른 그네들의 남산만한 배가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이제 나도 곧 저렇게 남산만해질 것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내겐 꿈같은 얘기였다. 아니 어쩌면 난 영영 저런 배를 가질 수 없는 여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하루하루가 고통스러웠다.
이렇게 속수무책일수가 없었다. 동생이 걱정을 하기 시작했다. 병원이 공사에 들어가고 어수선하니 좀 더 큰 병원으로 옮기는게 좋겠다고 한다. 친구들도 그렇게 얘기한다. 남편과 상의했다. 여러 아줌마들도 알아봐주었다. 남편과 제부가 여기저기 수소문 끝에 서울중앙병원의 김암교수님과 통화가 되었다.
남편이 교수님과의 전화 통화 끝에 이런 말이 들렸다. '네? 양수를 넣어보자구요?' 이게 웬 말인가? 양수를 넣을 수 있다니... 양수를 넣을 수 있는 방법이 있었단 말인가?
우리는 그 병원으로 옮겨가기 위해 바쁘게 서둘고 있었다.
마음으로 보살펴준 그 대학병원의 간호사님들과 의사선생님께 감사함을 표하며 난 엠블런스로 옮겨 탔다. 병원을 옮긴다는 말을 듣고는 심하게 요동치는 뱃속의 아기를 느끼며 아기도 무척 기뻐하고 있구나.. 하고 생각했다. 다음날, 나와 아기를 위한 국내 최고의료진의 노력과 우리의 인내가 시작되었다.
(나는 지금껏 큰 병원, 대학병원, 종합병원, 개인병원에 생각의 차이를 두지 않았다. 그랬더라면 처음부터 종합병원의 산부인과를 다녔을테니까... 하지만 나처럼 나이가 많은 산모인 경우나 초기부터 하혈이 있었던 경우에는 어쩌면 처음부터 좀 더 임상케이스가 많은 큰 병원에 갔어야 했는지 모른다. 아마도 내가 다니던 개인병원에서 그날 바로 수술을 했더라면 어찌되었을까? 내가 완전전치태반이라 자연분만을 유도할 수 없다는 말도, 재왕절개를 해야 한다는 말도, 수혈을 해야한다는 말도 전혀 없었던 그 병원에서 그 날 수술을 했다면... 정말 생각하기도 싫은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