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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잔혹한 시대를 어떻게 살아냈나...바,아,꽃님


BY 잔다르크 2003-05-03

바늘, 아리, 이쁜꽃향, 그리고 모든 에세이방님들
연휴 잘 보내고 계시겠지요?
전 맏이가 중학교 들어갔던
일천 구백 팔십 년대 후반부터 십 수년을
휴가란 개념 없이 그렇게 산 것 같군요.

아래 글로 궁금해하시는 것 같기도 하고
또 소개도 하고 싶은 마음에
타자를 한 번 쳐봤습니다.
예전의 제 일그러진 자화상을 대하는 듯 하여
잠시 슬픔에 잠기기도 하였지만......


['그는 그 잔혹한 시대를 어떻게 살아냈나' 중에서 발췌]

나는 그 때 오빠가 죽고 졸지에 가장이 되어 있었다.
어머니와 어린 두 조카를 굶겨죽일 수밖에 없을 것 같던 이 대착없는 가장은
이상한 활기에 이끌려 그 거리를 헤매다 기적처럼 쉽게 PX에 취직이 되었다.

그 바닥은 어질고 점잖은 사람을 알아볼 만한 고장이 아니었다.
나부터도 그랬다.
내가 말문이 열리고 또 어느만큼은 뻔뻔스러워지기도 해서
엉터리 영어로나마 미군들과 된소리 안된소리 수작을 걸 수 있게 되어
차츰 그림주문이 늘어나자 나는 화가들에게 방자하게 굴기 시작했다.
내 덕에 그들이 먹고살 수 있게 되었다는 교만한 마음과,
양갓집 처녀에다 서울대학생인 내가 기껏 간판장이들이나 먹여살리려고
여기서 이러고 있다는 자기모멸이 뒤범벅이 되어 얼마나 싸가지없이 굴었는지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얼굴이 화끈거린다.
내 아버지뻘은 되는 화가들을 김씨, 이씨 하는 식으로 함부로 대했다.
나는 그때 내가 더이상 전락할 수 없을 만큼 밑바닥까지 굴러떨어졌다고 여겼고,
그 불행감을 탐닉하는 맛에 살고 있었다.

어느 날 박씨가(화가 박수근) 두툼한 화집을 한권 끼고 출근했다.
나는 속으로
'꼴값하고 있네. 옆구리에 화집 끼고 다닌다고 간판장이가 화가 될 줄 아남'
하고 같잖게 여겼다.
그가 망설이는 듯 수줍은 듯한 미소를 띠고 나에게로 왔다.
화집을 펴들고 있었다.
숙제를 가지고 와서 선생님에게 칭찬받고 싶어하는 어린이처럼 천진무구한 얼굴이었다.
그가 어떤 그림 하나를 가리키며 자기 작품이라고 했다.
선전에 입선한, 촌부가 절구질하는 그림이었다.
우습게 알고 함부로 대한 간판장이들 중에
진짜 화가가 있었다는 건 나에겐 사건이요 충격이었다.
나는 몹시 부끄러웠고,
그동안 열중해 있던 불행감에서 깨어나 정신이 드는 것 같은 기분을 맛보았다.
그리고 능멸을 말없이 견딘 그의 선량함이 비로소 의연함으로 비쳐지기 시작했다.

그가 화가라는 걸 밝힌 것은 내가 죽자꾸나 빠져 있던 불행감,
실은 자기도취로부터 헤어나게 하려는
가장 그다운 심사국고였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은 한참 후의 일이다.
내 입장에만 몰두했던 시선을 돌려 남의 입장도 볼 수 있게 되고부터
PX 생활이 한결 견디기 쉬워졌다.
나만 억울하게 인생의 밑바닥까지 전락했다고 생각했는데
그 안에는 별의별 계층의 사람들이 다 섞여 있었다.
청소부 중에도 중학교 선생이 있는가 하면 고관의 미망인도 있었다.
전쟁이란 그런 것이었다.
그에 대한 연민이
그 어려운 시대를 함께 사는 간판장이들이나 동료 점원들에게까지 번지면서
메마를 대로 메말라 ?鰥??간 내 마음까지 ?Ъ탓윱?듯했다.
내가 막돼가는 모습을 그가 얼마나 연민에 찬 시선으로 지켜보아주었는지도 알 것 같았다.

- 박완서님의 산문집 '두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