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란 괴물이 우리를 삼키던 시절,
금융구조조정이란 명목 하에 자행된
일련의 조치들로 인해
어디론가 사정없이 내몰리게 되었다.
주위에서 들리는 비명과 절규는
강 건너 불 구경이려니 여기며
뒷짐지고 건성건성 무심히 쳐다봤던
어느 날 아침에.
고3 중3 초등5학년의 아이 셋과 팔순을 넘긴 시어머니,
교통사고 후 척추를 비롯한 여러 골절과
마디마디 관절통으로 한심스런 몰골인 나,
바람 앞에 등불 같은 존재들이었다.
책임을 져야 할 자리에 있었다는 이유로 가해지는
신원보증을 선 나와 지기들의 잇따른 재산압류,
봇물처럼 터져 나오는 원망과 탄식소리,
일순간에 공황상태로 빠져들었다.
수시로 검찰에 불려가
십 수년이 지난 업무를 기억해내라고
추궁을 당하던 장본인은
가족은커녕 자기 몸뚱이 하나 지탱하기도 벅찬 처지가 되어있었다.
'고아원엔 부모 없는 아이들만 가는 게 아니구나!'
나라도 나서볼 요량에 어설픈 몸짓으로 발 품을 팔았으나
'아줌마 구함' 이란 반가운 쪽지는
그림의 떡일 뿐이었다.
"집 전화번호를 적어놓고 가세요, 나중에 연락 드리리다."
일 부려먹기 힘들다는 걸 단번에 알아보고 한 군데서도 연락이 오지 않았다.
분노와 자학, 대인 기피증이 심한 우울증으로 진행되더니
급기야 친구 손에 이끌려 신경정신과 치료를 받기에 이르렀다.
"사램이 당해 몬 넘어가는 일은 없느니라.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죽으란 법은 없다."
모진 세월을 감당하셨던 친정어머니의 독백 같은 위로도
울리는 구리와 소리나는 꽹과리에 불과할 뿐이었다.
아파트 대 단지가 들어서며 새로 지은 학교 운동장은
심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보이는 히말리야시다가
제 힘에 버겁도록 팔을 벌리고있었지만
썰렁하니 을씨년스러웠다.
'그래, 내 병원비이라도 덜자!'
화단 한 쪽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한참을 흐느꼈다.
고층 아파트를 넘느라 헐떡거리던 늦여름의 햇살이
운동장으로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이 세상을 버리는 것이 가족을 위해 베풀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 거야!'
정신이 오락가락하며 질질 썩은 고름을 짜내듯 헛소리를 뱉었다.
'자연도태라고 했던가?' 여고시절 작달막한 키로 열강을 하셨던
생물선생님의 반짝거리는 대머리가 떠올라 피식 웃음이 나왔다.
혼자서 울다 웃다 어둑해지면 유령처럼 방으로 스며들어
'한 오라기의 빛도 내치고 싶다' 는 단호한 결의로
머리끝까지 이불을 뒤집어 씌고
꼬리에 꼬리를 문 온갖 상념들과 치열한 싸움을 했다.
"우째 지 목숨을 지가 끊을 수 있단 말이고?"
덩달아 손가락질을 해댔던
군상들 중 하나였지만
이 세상에 그럴 수 없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헝클어진 매듭을 풀 사람은 나 밖에 없다!'
몇 달을 걸터앉아 울었던 화단 귀퉁이엔
겨울채비로 부산스런
미물들이 바글거리고 있었다.
내가 풀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자 주섬주섬 마음을 추스렸다.
여태 온갖 궂은 일 죄다 남편 어깨에만 지워 놓고
철부지처럼 어리광만 피웠던 지난날이
낡아빠진 흑백 영사기처럼 삐거덕삐거덕 소리를 내며 돌았다.
'참, 힘들었겠구나!
신이 나에게도 그 짐의 무게를 가늠해 보라고 주신 기회일까?'
여태 당연시하며 살아왔던 가슴 한 켠이
따끔거리며 알싸하니 아려왔다.
사정 사정을 해 입주허가를 받은 조그만 임대 아파트에
아들이 짬짬이 페인트칠을 하고
어려운 처지에 놓인 가정에 무료로 도배를 해준다는 복지관에 전화를 넣었다.
분홍색 벽지가 수줍게 웃자 대충 이삿짐을 꾸렸다.
꼭 필요한 이불과 옷가지, 책상과 의자,
급하게 챙겨 나온 취사도구가
흡사 피난보따리처럼 단출했다.
'어차피 당한 일, 하루라도 빨리 눈높이를 낮추는 게 상책이리라!'
중략...
처음 얼마 동안은 산 것이 아니라 살아졌다.
돌이켜보건대 죽고싶을 만큼 고달픈 과거지사이기 전에
한 인간을 홀로 서기에 도전하도록
세월이 등을 떠밀었던 특별한 기회였다고나 할까?
금방이라도 멈춰버릴 것 같았던 세상은 오늘도 바쁘게 돌아가고 있다.
이런저런 시행착오와 갈등도 있었지만
'이만큼이라도 살아 낸 게 어딘가?'
제 풀에 겨워 스스로를 다독거린다.
간혹 아이들 교육에 대한 중압감으로 뒤척이다 잠이 드노라면
나도 모르게 가위에 눌릴 적이 있다.
그러면 잠결에 중얼중얼 체면을 건다.
'너, 여태 용케 잘 버티고 있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