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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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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게 늙어가는 방법 29


BY 녹차향기 2000-12-13

이틀동안 몰아치던 칼바람이 오후 들어서부터는 다소 주춤거리는 듯 싶네요. 옷 속을 파고 드는 바람이 어찌나 매섭던지요....
추워서 제 맛이라지만,그래두 넘 추우면 자꾸만 몸이 움츠러드니 부엌에서 일하기 싫어지지요, 빨래하러 다용도실로 들어가기 싫어지지요, 찬거리 사러 나가기 싫어지지요, 그러다보면 이래저래 할일만 자꾸 쌓이잖아요.... ^.^;

오늘 하마트면 큰 일 날뻔 했었어요.

남편과 외출하기 위해 즐겁게 조잘대며 횡단보도에 서 있다가 신호가 바뀌자 곧 건너기 시작했지요. 근데, 저희 동네 신호등 설치가 미비한지, 운전자들이 잘 볼 수 없는 곳에 신호등이 설치 되어있는지, 보행자들은 신호가 바뀌어서 횡단보도를 건너는 도중인데도 차가 속도 내어 달려오다 보행자를 보고서야 급정거를 해서 종종 사고가 일어나기도 했었는데...
오늘은 남편이 당할 뻔 했어요. 제가 소리를 지르지 않았더라면, 아마....
윽! 생각만 해도 끔찍하네요...

몇번이나 건의를 올렸지만 별다른 뾰족한 대책이 없는건지, 신호등 크기만 바뀔 뿐 도대체 제대로 된 표지가 없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고, 운전에 부주의한 운전자들이 어쩜 그렇게 많은지...
저보다 몇발자욱 앞서서 건너가던 남편의 얼굴을 병원에서나 보고 있었다면 어쩔 뻔 했겠어요?
전, 특히 아주 유별나도록 남편을 사랑하고 사는 사람이라 만약 그이가 이 세상에 없거나 아니면 몇 달간 볼 수 없다고 하면 아마 시름시름 앓아 누울 지도 몰라요.
사실, 좋아한다는 고백도 제가 먼저 했었걸랑요... ㅠ.ㅠ;;;
지금도 누워자면서 이미 잠든 남편의 얼굴을 쓰다듬어 보고 머리도 뒤로 곱게 넘겨주곤 해요....

횡단보도를 건너 반대편 쪽에 도착하도록 그 미친(?)차와 미친(?)여자 운전자를 향해 소리를 질러주었지요.
'도대체 운전을 어떻게 하는 거예요?'
여자들이 차를 끌고 나오면 듣게 되는 그 욕 비슷한 말이 제 입에서도 나올 뻔 한 걸 억지로 참았답니다.
'그러니 여자운전자들이 욕을 싸잡아 얻어먹고 다니지....'
횡단보도가 가까운 곳에서는 신호에 특히 주의를 하고, 꺼진 불도 다시 보자는 마음으로 주의에 최선을 다해야 해요.
특히 툭툭 튀어나오는 아이들이 얼마나 많아요. 게다가 퀵보드까지 타고 다니는데.... 조심조심조심 해야죠...

한참 시간이 지나 겨우 콩닥거리는 가슴이 진정되고 나서야, 전 제 친구 숙이를 떠올릴 수 있었어요. 남편이 교통사고로 수년전 먼저 저 세상 사람이 되어버리고 혼자 은행에 다니며 귀여운 두 딸을 키우고 있는 제 친구 숙이도 제가 제 남편을 좋아하는 것 만큼이나 그렇게 자기 남편을 사랑하고, 좋아하고 금술이 얼마나 좋았는지요....

그 남편되는 사람은 두 사람이 결혼전에 이미 저두 알고 있었던 사람이었는데, 우리 셋은 직장이 끝나면 곧잘 볼링을 치러가곤 했었어요.
주말이면 함께 만나 식사도 하고, 커피도 마시고....
시간이 많이 지나고서야 두사람이 좋아했었다는 걸 알았고, 두사람은 곧 결혼식을 올렸지요.
제가 그들의 결혼소식을 듣고 얼마나 좋아했었는데요.

너무나 늠름하게 생긴 키도 크고, 어깨도 떡 벌어지고, 얼굴도 말끔하게 생긴 그 남자와 반짝이는 눈이 아주 예쁘고 입술이 앵두같던 제 친구 숙이는 너무 잘 어울리는 커플이었어요.
그리고 몇해.... 가 지났어요.(결혼 초 전 너무나 힘든 시기를 지내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하고도 연락하지 않고 지냈어요)
어느날, 아주 우연히 두 사람의 소식을 들었을 땐 이미 그 남자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어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다는 느낌.... 가슴이 답답하고, 울컥 치밀어오르는 원망!!
갸냘프게만 해서 왠지 보호해 주어야할 것 같은 제 친구 숙이는 도대체 어떻게 하라고 이런 일이 생기는 가 싶어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는데...

친구 숙이는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홀어머니 밑에서 성장해온 그래서 늘 조금은 그늘져 보이고, 기운없어 보이던 친구였는데, 그 친구가 겨우 맛본 인생의 행복은 너무나 짧았어요

용기를 내어 친구 숙이에게 전활 걸었더니... 의외로 아주 차분하고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하더군요.
'내가 너무 사랑하니깐, 그 사랑을 평생 간직하라고, 먼저 가서 기다리나 봐.....한 집을 이루고 살면서도 어쩜 매일매일 그렇게 좋고 행복하고 남편이 좋을 수가 있겠니? 다들 날보고 이상하다고 할 정도로 너무 좋더라.. 너무너무 사랑스럽고 좋아서 이런 행복이 나에게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는데.....'


지금은 퇴직했던 은행에서 그 사정을 알고 재취업을 시켜주었고, 다시 은행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어요. 아이들은 친정엄마가 돌보아주시고요. 그 친구에게 자주 전활하려고 해도, 왠지 제 행복한 마음을, 남편을 아직도 사랑하고 있는 제 마음이 그 친구에게 드러날까봐 미안해서, 혼자 버거운 삶을 짊어지고 있는 친구에게 미안해서 수화기를 들었다가는 도로 내려놓곤 했지요.....

버스에 앉아 안도의 한숨을 내 쉬며, 남편의 손을 다시 따뜻하게 잡아보았어요.

추운 겨울인데도 우리 가족을 위해 반복되는 일상 속으로, 힘든 어쩌면 너무나 치열한 생존경쟁 속으로 뛰어드는 남편의 모습이 너무나 고맙고 미안해서 남편의 손을 꼬옥 잡고 있었어요.
지금은 그이가 좋아하는 김치찌개를 끓여놓고 기다리고 있는 중이예요.
오늘은 다른 날보다 조금 늦을거라지만 그냥 기다리고 있을려고요.


들어오면 한 번 꼬옥 안아주고 싶네요.


글구, 그 친구에게 한 해가 다 가기전에 예쁜 편지를 써야겠어요.
이멜도 좋겠지만 오랜만에 사람냄새가 물씬 나는 그런 편지가 더 적당하겠지요?
옆에 있는 그 사람, 옆에 있는 남편,
사랑하세요?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아름다운 사랑이세요?

연애때의 불타는 듯한 열정은 이미 사라졌겠지만
생활해 오면서 알게 모르게 미워도 하고, 실망도 하고, 때론 돌아서
버릴까 싶을 정도의 나쁜 일들도 있었겠지만
그런 세월들이 지난다음 우리 앞에 쌓인 情말이죠...
그 아름다운 위대한 情...

오늘 돌아오는 남편의 두 손을 따뜻하게 잡아주세요.
의아해 하는 남편에게 맛있는 귤도 먹여주세요.
그래야 오래도록 우리가 더 좋은 세상을 아름답게 살 수 있을테니깐요.


모쪼록 모두들 평안한 밤 되세요.

안녕히 주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