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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


BY 손풍금 2003-03-07

한건물에 다섯가구가 살면서도 계단에서 만나면 눈인사조차 하지않고 고개를 숙이고 지나친지 벌써 두해가 다가오고 있다.
한달에 한번이나 볼까말까 했던 아래층 젊은 주인여자가
지난봄 초인종을 눌러 문을 열어주었더니 오늘 수돗물을 틀어놓고 나가 비상열쇠로 따고 들어와 물을 잠갔다고 언성을 높힐때
'미안해요. 정신이 없어서.. 우리집꼬마가 모르고 안잠그고 나간 모양이네요.
이번달 수도세 더 낼께요'하는 내말에 단박 말을 받아 그여자는 '아줌마 얘들이예요?' 한다.

'뭐라구요?...?, 그럼 우리아이지 누구 아이예요?'하니
'아.. 아니요. 주소도 없이 와서 살아서요.'하고는 미안하단 말 한마디도 없이 내려간다.
주소도 없이... 주소도 없이 와서 살아서... 하는데 차마 나뭇가지위에 얹혀진 제비집에 살아도 그런소린 안듣겠다 싶었다.

몇번 살던사람이 바뀌는듯 하기도 했지만 나는 여전히 복도에서 만나면 고개를 숙이고 비껴지나가고는 했는데
지난 구정을 하루 앞둔 날, 등기물을 주인집여자한테 맡겼다는 메모지를 보고
아랫집에 내려가 초인종을 누르자 주인집여자는 고개를 빼곡 내밀며
'경찰이 와서 이것을 주고 가데요'한다.
남편에게 내려진 접근금지 명령서 였다.

'고마워요.'하고 돌아서는데 이번엔 또
'그 아저씨 아줌마 친남편 맞아요?'한다.

그말에 나도 모르게 입술을 꼭 깨물었는데 입안에서 찝찌름한 액체가 퍼졌다.
'아이들은 누구얘들이예요?'하더니 '친남편이 왜 그러지?' 하는말을 듣는 내 온몸이 저리도록 아팠다.

꼭대기 계단앞에 서서 숨을 골랐다.
방안으로 들어오자 아이들이 나를 바라보더니 '엄마, 입술에서 피 나..'하고는 놀라 바라본다.
응.. 모르고 입술을 깨물었어. 하는데 화가나서 견딜수가 없었다.

목욕탕에 가서 수돗물을 세게 틀어놓고 세수를 했다.
한참을 물을 틀어놓고 앉아 손을 담그고 있었다.
또 물을 잠그지 않았다고 쫓아올라오면

당신 조금전에 내게 한 그걸 말이라고 하느냐고 소리지를 참이다.

그렇치만 혼자 앉아 있는 욕실에 내흐느낌은 밖으로 새어나가지 못하고 나와 함께 몇시간이고 앉아있었다.

주인집 아들아이와 내딸아이는 같은 학년인 모양이다.
신학기가 다 와가는데 아랫집아이와 같은반이 되면 딸아이가 상처입을듯 싶은 걱정이 앞섰다.
같은반이 되면 그동안 이사하려고 계획했던것을 실행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남편의 폭력을 피해 한국여성보호센터의 도움을 받아 주소지 신고를 하지않고 이곳으로 이사를 왔을때 아이 학교의 교장선생님께서 '참, 그동안 많이 힘드셨지요, 걱정하지 마시고 전혀 부끄러워 하지 마십시요.'했던 교장선생님과 담임선생님,
그래도 감사한사람이 더 많았던 시간 아니였는가..
그리고 오늘
교장선생님께서 전화를 주셔서"잘 읽었습니다. 우리학교 선정도서로 추천을 했습니다."하시고는 끝까지 말씀을 잇지못하시고 전화를 놓으셨다.

**
어제 아침 신문을 펼쳐보는데 내모습이 보였다.
다른사람 일인듯 천천히 읽어내려갔다.
아마도 허름한 시골장터를 찾아드는 장꾼이 책을 냈다니 그 사실 하나로도 충분히 화제가 되는듯.. 어떤 기자는 책한번 읽어보지 않고 흐르는 기사를 하나 들고 와서는
'컴퓨터는 누구한테 배웠나요? 빵은 주로 무슨빵을 구웠나요?..
바닐라 수제비 장사도 했었나요?'하는데는
'아줌마 아이들인가요? 친남편 맞아요?'하는말이나 똑같이 모욕스러웠고 화가났다.

한참을 내려가며 읽다보니 면사무소 일용직 청소원을 지냈고 하는 기사가 떡하니 올려져 있다.
멍하니 바라보다 전화를 들고 취재기자한테 항의를 했더니
'정식직원이 아니면 아주머니들이 할수있는일이 청소원일거라 생각했습니다.
아, 미안합니다, 벌써 다 나간 기사니 어떻게 할 방법이 없잖습니까?'한다.

**
입에 침이 다 마르는 며칠이 지났다.
아침을 먹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지친몸을 이끌고 계단을 오르는데 일층 계단입구에 작은신문지 조각 하나 바람에 흔들리며 붙여있다.
수도세 공지인가 하며 다가 섰는데 오늘아침 신문에 난 기사를 누군가 오려 붙여놓았고 그 아래엔
'우리 건물 꼭대기에 살고 계시는 아주머니입니다.
우리 모두 축하드립니다.
축하합니다. 아주머니,

펄럭거리는 얇은 신문지 조각을 바라보는데 내 심장도 함께 펄떡거리고 있었다.
누군가 저 신문을 오려 붙였을 이층을 지나면서 웃음을 내려놓았고 주인집이 보이는 삼층을 지나면서도 베시시 웃음이 흘러나왔고 맨 꼭대기 내집앞에 섰는데 갑자기 두다리에 힘이 주어졌다.
올라온 사층계단을 뛰어내려가 가방을 내려놓고 펜을 꺼내
신문지 조각 아래

'축하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이 건물 꼭대기 아줌마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