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주 가지도 않지만
일년에 한 두번
친정에 가게 되면
형제들을 만난다.
사십 다 되셔서 본
늦둥이 여동생을
금이야 옥이야 애지중지
기르신 친정어머니와
맞닥뜨리는 순간부터
싸움 아닌 싸움을
하게 되는 것도 이때이다.
엄마의 유별난 사랑 덕분인지
본인 머리가 따라주어서인지
여동생은 국내 유수 국립대학의
대학원 학위를 수여하고
지금 모교에서 의대 조교로
목하 근무 중이다.
형부들도 박사요,
엄마에겐 친아들과도 같은
사촌 오빠도 박사로서
카이스트에 근무하는,
친정은 가진 것은 없어도
자식들 학위로는 남 부럽지 않은
부자인 셈이다.
시골집 장남으로서
본인의 노력으로 대학을 졸업한
남편은 삼년 전 나의 권유로
대학원에 진학한 다음에야
직장과 늦은 학업을 병행하기로
결심한 진정한 이유를 말해 주었다.
처가에 갔을 때
손윗 동서나 손윗 처남,
처제와 이야기 할 때
논문이니 세미나니 하는
말이 나오면 자기가
대화에 끼일 수가 없었노라고.
우리 같은 서민에게
학력은 조금 더 나은 경제적
여유를 향유할 수 있는
보증수표와도 같은 것이다.
가난한 집의 장남으로서
남달리 영민한 어린시절을 보낸 탓으로
주위의 기대도 보통이 아니었지만
대학 이상의 공부는 혼자의 힘으로
무리였을 것이다.
남편의 속내를 들었을 때
마음이 아팠다.
그리고 이왕 늦게 시작한 공부
박사 학위까지 받도록
뒷바라지를 잘 해야지...
내심 다짐했었다.
그런데 대학원은...
그곳에도 사회와 똑같이
빈부의 차이가 있었고
집안 좋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었고,
돈 많은 사람과
남편처럼 가난한 사람이 있었다.
사시, 행시를 패스한
관악구 S 대 출신은 발에 밟힐 정도였고
그들의 전직 또한 화려해서
국회 사무관, 세무서장, 공인회계사,
노동부 사무관...
그게 문제였던 모양이다.
그저 성실하게만 살아왔던 남편이,
돈이라고는 자기 주머니에 용돈만
풍족하면 욕심을 모르던 남편이,
돈에 욕심을 내고 큰 집을 탐하고
어린 아이들을 유학 보내고 싶다는
말을 심심찮게 내뱉고......
빤한 월급쟁이 생활로는
평생 뼈 빠지게 손톱 밑에 넣고
절약해서 저축해봤자 서울 시내에
집 한 채 사기 어렵다는 이야기를 하더니
가진 돈을 몽땅 주식에 투자를 했다.
모든 주부들의 타령처럼
먹을거 안 먹고, 입을거 안 입고
모은 현금을 날리는데 일 년이
채 걸리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이 겪는 마음병을
나도 물론 앓았다.
그렇지만 남편과 혹여 싸우게 되더라도
주식으로 날린 돈 이야기는
절대 하지 않았다.
살아가면서 한 번의 실수는
누구나 하지 않는가......
그것으로 끝이었으면 했다.
돈도 날릴만큼 날렸고
젊은 나이에 홧병이 생겨
한의원을 들락거리며 치료도 했고
한의사 앞에서 증세를 제대로 설명 못하고
눈물만 흘리는 나를 보면서
그도 깊게 한숨을 내쉬었으니
이젠 끝이려니 했었다.
무사히 석사 학위를 받고
전세지만 아이들을 위해
넓은 아파트를 골라
서울로 이사도 했다.
그런데....
몇 달 되지 않아
남편의 주식병은 평생 갈 고질병이며
그 병은 현재도 진행 중임을 알게 되었다.
그나마 내가 가지고 있던 돈도
애원하며 매달리는 남편에게
포기하는 심정으로 다 내어주고
은행 대출에, 그 이자에...
결국 아이들이 좋아하던 넓디 넓은
아파트 전세금을 빼내 일부를 갚고
육개월 만에 지금의 집으로
또 이사를 했다.
아이들이 받을 충격이 마음에 걸려
이사 전날까지 얘기를 못하고 있는데
겨우 열 살이지만 주식병 걸린 아빠 보다
나에게 위안이 되는 큰 아이가
엄마, 우리 내일 이사 하죠?
나는 마당집(개인주택)이 좋던데
엄마, 거기 마당집이죠?
아마 남편과 하는 이야기를 들은 모양이었다.
부모의 고민을 덜어주려고 어린 것이
저런 연기를 하다니...
처음으로 눈물이 왈칵 나왔다.
이사하던 날
살던 아파트의 1/3 밖에 되지 않는
집에 짐이 들어가지 않아
절반 이상을 밖에 쌓아둔 채
한달 두달 살다보니 신기하게도
그 짐들이 하나씩 집안으로
자리를 잡아간다.
그동안도 남편은 주식투자를
계속 하고 있고
친정 언니며 친정 엄마에게서
빌려온 돈도 몇 천이 된다.
하지만 깊게 생각하지 않으려 한다.
그 빚을 언제 다 갚나...라든가
애들 공부는 어떻게 시키나...
이런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저 사람 잃는 것 보다
돈 잃는 것이 낫다며
나에게 최면을 걸며 산다.
주식 같은 걸 만든 인간은 누구일까?
그런 원망 아닌 원망을 해 본 적도 있었다.
남편도 언젠가는 한 건 하든지
아니면 자기 잘못을 깨닫기라도 하겠지...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내 마음 속에
남편에 대한 미움이 싹트지 않고
그 날이 왔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때까지는
남편이 아니라
오직
주식만 미워하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