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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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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지춘향이보다 이런 내가 더 좋다


BY 잔다르크 2003-02-15

둘째와 셋째는
말하자면
눈만 마주쳐도 토닥거린다.

지나가는 아이 하나가
무심코
으쓱한 골목에 죽치고 있는
날라리를 보며 걸어갔는데
무다이 왜 쳐다보냐며 시비를 건다는
뭐 그런 형국이다.

눈감고 걷지 않는 도막엔
어떻게 안 볼 수 있단 말인가?

아무리 사소한 일일 망정
걸려고 덤비면
거저 넘어갈 일이 어디 있으랴?

말투가 기분 나쁘다고 투다닥,
우짜다가 지 몸을 건드렸다고 앙앙,
별에 별 건수로
서로 물고늘어지는 일이 다반사다.

그저께 저녁,
난 싱크대에 붙어서
새내기 대학생이 되는
둘째의 학교생활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며
설거지 중이었고
늘어지게 낮잠을 잔 아들은
막 수저를 들고 식사를 하려던 참이었다.

열 잘 받은 걸로 하자면
누구에게도 안 뒤지는 둘째가
갑자기 탁! 하고
젓가락으로 식탁 위를 치더만
지 여동생하고 또 한바탕 붙을 기세다.
지나가미 던지는 말투가 마음에 안 든다나 뭐라나?

영문도 모르는 난 속으로
'옳거니!!
폭력엔 초기에 소극적으로 대처하는 게
더 큰 폭력을 양산한다고 했겠다......'

싱크대 안에 있던 냄비를 냅따 바닥으로 패대기를 치며
"그래? 니가 버릇없이 이 어미 앞에서 젓가락을 던지면 난 냄비라도 던져야 할 꺼 아이가?"
"......"
"니가 한 번 하만 난 열 번은 할 끼다! 아암..."
눈에 보이는 데로 옆에 있던 오만 살림살이를 마구잡이로 내동댕이쳤다.

둘 다 난장판이 된 광경에 놀랬는지
한 넘은 들다만 밥공기를 내버려두고
방안으로 들어가 꼼짝을 안 하고
막내는 쓸어 담는다고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들고 설친다.

"클 적에
'여자가 참아라!' 는 말을 하도 들어서
멋모리고 여태 살았는데
그 기 남자를 위하는 기 아이더라.
너그 엄마는 그 꼴 몬 본다."

"제발 밥은 묵고 자라!" 고 싹싹 빌던
예전의 지고지순한 어미노릇도 사양하고
그동안 살아온 세월의 화풀이까지 겸해
주절주절 한참을 늘어놓고서야 일단락 되었다.

돌아가신 우리 할머니는
당신의 귀한 외아들이 이런 저런 허물로
며느리한테 닦달 당하는 것이 안쓰러우셨는지
늘 내 입을 막으셨다.

억울하게 당한 사연들,
하소연이라도 했으면
한이라도 안 남았을 텐데
유독 손녀딸인 나한테만은 한사코 참으라고 하셨다.

그 버릇은 오랫동안 내 발목을 잡아
치밀어 오르는 감정
그냥 꾹꾹 눌러
안으로 곪아터지는 줄 모르고
재여 놓기에만 길들어져 있었다.

수 년 전
한바탕 정신적 홍역을 치르고 난 뒤에야
"NO" 라는 말을 자연스럽게 할 수 있게 되었고
현재 내 기분이 이러저러하다는 말을 곧잘 내뱉는다.

더러는 터프 하다고도 하고
혹은 매몰차다는 반응도 보인다.
우물쭈물하는 것 보다
명료해서 좋다는 사람도 있다.

당연히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겠다고
억지춘향이 노릇을 하던 예전의 나보다
이런 내가 더 좋다.

덕택에
흉측스럽게
한 쪽 손잡이가 떨어져 나간 냄비가
우리 가족의 시야를 어지럽히긴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