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마득히 높은 곳에 창문이 보인다.
창틀을 잡고 안간 힘을 쓰고 기어 올라간다.
10층까지 가야만 한단다.
1... 2... 3....9...
드디어 창틀에 걸터 앉아 창문을 열어 젖혔다.
길 건너편엔 아주 오래 되어 낡아빠진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데 그 앞을 지나는 도로는
형체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폭탄을 맞은 듯이 움푹 패인 길 옆으로
간신히 비껴 서있는 허술한 집들.
그곳에서 누군가가 나를 부른다.
어서 오라고...
다시 창틀을 붙잡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느결인가 창문은 사라져버렸다.
눈 앞에 보이는 건 화분들이 줄줄이 늘어선 화분대.
사다리처럼 층층이 세워진 화분대를 잡고
조심조심 한발을 내 딛는데 갑자기
화분대가 맥없이 주저 앉는다.
황급히 손을 아래로 뻗어서 밑에 있는 화분대를
잡는데 몸이 휘청거린다.
아래를 내려다 보니 천길만길 낭떠러지다.
다시 올라 설 수도 내려 갈 수도 없다.
거미줄에 걸린 곤충처럼 흔들거리는 화분대를
움켜쥐고 바둥거린다.
앞이 캄캄해진다.
아직 내려 갈 길은 아득하기만한데...
그래도 가야만 한다.
화분들이 하나 둘 쓰러지며 아래로 추락한다.
어찌해야 하나...
있는 힘을 다해 다시 화분대를 잡는다.
얼마쯤이나 왔을까.
짐작으로는 4층이나 3층쯤 되는 것 같다.
누군가가 뒤에서 내 허리를 잡는다.
"조심해요~~~"
난 암벽타기하는 산악인처럼 외줄을 타고
겅중겅중 뛰어 내린다.
그 사람의 도움을 받아서...
힐끗 뒤를 돌아보니 큰 키에 후리후리한
체격의 남자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서있다.
검정색 양복에 흰 와이셔츠를 입고
단정하게 넥타이까지 멘 신사.
누굴까...
전혀 모르는 얼굴이다.
******
시계를 본다.
새벽 3시가 조금 넘었다.
너무도 생생한 꿈.
다시 잠이 올 것같지 않아 자리를
털고 일어나 창가로 간다.
순하디 순한 모습으로 깊이 잠든 산.
평소 자동차의 물결로 홍수를 이루던
도로가 거짓말처럼 한적하다.
길 양편으로 줄줄이 늘어선 가로등이
다이아몬드처럼 불을 밝히고 서있다.
마치 강물위에 떠 있는 별처럼
아득한 아름다움마져 느껴진다.
루비처럼 반짝이던 신호등이
순식간에 초록빛으로 변한다.
보이는 것은 캄캄한 어둠과 불빛뿐이다.
난 어디쯤에 서있는 것일까.
갑자기 기억상실증에 걸린 환자처럼
막막해진다.
꿈은 단지 꿈일 뿐인데도.
어릴 적엔 우물에 빠지는 꿈을 자주 꾸었다
까마득한 우물속으로 빠지는 순간
귀에서 들리던 그 멍~~한 울림.
이건 꿈이야. 걱정하지 말고 마음껏 즐기며
멋지게 떨어지는거야.
꿈속에서 난 또 꿈을 꾸었다.
"키크느라고 그런거란다."
엄마는 말했었지.
악몽을 꾸고나서 현실로 돌아왔을 때의
평화. 아늑함...
긴 세월흘러 어른이 되어버린 지금
그 평화는 어디로 사라져버린 것일까.
새벽은 고요하고 내곁엔 사랑하는
가족이 잠들어 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