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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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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만심이 많다.' 그 것이 내 속성인 것을...


BY ns... 2003-01-26

초등학교 때 4년 동안 한 선생님이 담임을 했다.
그 선생님은 성적표의 가정 통신 난에 나에 대해 매번 이렇게 쓰곤하였다.
그 글귀가 기억 난다.
‘자만심이 많고 사회성이 부족합니다.’
그 선생님이 정말 나를 잘 알고 계셨구나 하고 지금도 감탄한다.
어렸을 적 나는 내가 생각해도 참으로 당당한 아이였다.
어렵게 생각되는 것도 무서운 것도 없었다.
산 채로 뱀을 잡아 작대기에 묶어 들고 날 놀리려 하던 동네 개구쟁이들은 오히려 자기들이 ‘어어..’하고 놀라 슬그머니 뒷걸음 쳤다.
갑자기 그런 것을 눈 앞에 들여대도 놀랄 줄 모르는 아이였기 때문이다.
물론 징그럽기야 했지만 내 자존심은 징그럽다고 피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던 것 같다.
무슨 어린애가 그리도 자존심이 강했던 것인지 나도 나를 모르겠다.
중학교 때도 고등학교 때도 난 늘 엉뚱한 아이였다.
누구나 교복을 입고 다니던 그 때 ‘교복 살 돈이 없는데요.’라는 말로 선생님의 입을 막아 놓고 교복도 없이 태연히 학교를 다녔다.
친구의 말에 의하면 내가 갈래머리 따서 둘로 묶고 창가에 팔장 끼고 서서 친구들을 바라보며 실실 웃기를 잘했단다.
그 때 자기는 나를 보며 이 세상의 체면이니 위신이니 하는 것을 무시한 채 사는 아이라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

대학에 다닐 때 이야기다.
이제는 기억도 희미하지만 아마도 교육사라는 이름을 가진 과목이었던 것 같다.
공부에 흥미도 없었고, 전공도 아니었고, 돈도 없었기에 책도 사지 않고 강의를 듣고 있었다.
노트 정리를 잘하는 것과는 원래 거리가 멀었고, 수업 시간에 땡땡이 치는 일에는 일등이었다.
수업이 일찍 끝나서 교문을 나서도, 오늘도 땡땡이냐?고 묻는 친구가 있었던 걸 보면 엉터리 학생이었던 것이 분명하다.
교양과목 이었던 교육사는 서 너 개 학과가 함께 수강하고 있어서 수강 인원이 많았다.
그것을 악용해서 출석을 부를 때 대답만 하고 그것도 출석하지 못한 다른 친구 대답까지 대신 해 놓고 슬며시 뒤로 빠져 나오기도 했다.
학점을 얻기 위해서 필요한 최소한의 수업 시간마저 그런 방법으로 때우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시험을 며칠 앞두고 책과 노트를 펴 놓고 찾아보며 시험치는 방법을 택하겠다고 교수님이 말한 것이다.
책도 노트도 없는 내겐 절대적으로 불리한 방법이다.
그렇다고 친구의 노트를 빌려 베낄 성의도 그 때는 없었다.
무슨 배짱이 그리 두둑했던지 나는 시험 보는 날 아침에야 서점에 들려 책을 찾았다.
물론 품절되고 없었다.
망설이다 지은이가 다른 교육사 책을 한 권 사 들고 서점 문을 나섰다.

시험이 시작되었다.
문제를 읽고 책의 목차를 뒤져 관련 글이 있을 만한 페이지를 찾아 내고 그 페이지를 찾아읽은 후 답을 적어 나갔다.
노트는 없으니 볼 필요도 없고 수업 시간에 열심히 들은 적도 없으니 기억을 더듬으려 애 쓸 것도 없었다.
오히려 다른 친구들 보다 여유만만했다.
참고 자료가 적으니 바쁠 것이 없었던 것이다.
다른 아이들은 이것 저것 찾느라고 바쁠 동안 여유 있게 객관식 문제를 해결하고 마지막 주관식 문제까지 내 엉터리 생각을 곁들여 그럴 듯하게 답안을 작성해 제출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변이 생겼다.
시험 결과를 발표하는 날, 최고점수를 받은 사람이 나로 밝혀진 것이다.
아마 다른 아이들은 시간에 쫓겨 제대로 문제를 읽고 풀지도 못했던 모양이다.
이런 것을 운명의 장난이라고 해야 하는지 신은 내게 점점 더 커다란 자만심을 심어주었다.

나는 오만함이 지금도 나를 끌고 다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남들은 노후 대책을 생각할 나이에 이민을 와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겠다는 것은 혹시 오만이 아닐까?
더구나 남들이 부러워하는 직업과 직위를 가진 남편보고 모든 것 포기하고 살림이나 하라고 하고 전업주부로 이 십 년을 집에서 살림이나 하던 내가 앞에 나서 능력을 펴보이겠다고 하는 것을 보면 정상적인 사람의 생각으론 분명 미친 짓이다.
그것도 무슨 전문적인 지식이 있는 것도 아니고 말도 글도 서툰 이 나라에서 시작할 수 있는 것이 밑바닥부터 임이 뻔한데 말이다.
그러나 나는 내 삶을 살 수 밖에 없다.
아직까지 겸손을 배울 기회가 없었으니 배우지 못한 겸손이 내게 있을 리 없다.
내 처지를 인정하고 순순히 주어진 편안한 삶을 사는 겸손함을 모르는 나는 늦은 나이에 모험을 하는 것이 두렵기 보다 즐겁다.
사업에 실패하고 노후에 늙고 병들고 돈마저 없으면 어떡하나 하는 염려가 날 묶어두지도 못한다.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
얼마나 순리에 맞는 삶일까?
늙어 일 할 수 없을 그 때에 먹기도 포기하고 죽을 수 있다면 얼마나 깨끗한가?
성경은 내게 이 구절을 노후대책으로 삼도록 써 두었다는 생각이 든다.
오래 살고 싶은 지나친 욕심에 눌려 노후에 추한 모습으로 사는 사람을 위해 성경은 이런 말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이 드니 말이다.
이렇게 뒤늦게 얻은 종교마저 나를 더욱 자신만만한 사람으로 만든다.

누구에게 들은 말이 생각난다.
생을 마치는 노인들에게 물었단다.
‘또 다른 생이 주어진다면 어떤 삶을 살고 싶습니까?’
그 사람이 정답을 말해주기 전에 나는 알고 있었다.
‘좀 더 많은 모험을 해 보고 싶습니다.’
그게 바로 내가 살고 싶어하는 삶의 모습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