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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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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 오세가 딱 좋다


BY 이화 2001-07-26

엄마들에게는 개학이라는
여름 방학이 시작되었다.
초등 1, 3학년인 딸내미 둘,
조금 부잡한 편이라 손이 많이 간다.
찌는 듯이 더운 날 나의 한달간 생활이
가슴 뻐근하게 예상이 되면서 매일매일을
어떻게 보내나...고민도 많았었다.

애들이 방학이면 내 재미를 위해서
나도 시간을 투자하자...
펀뜩 떠오른 묘안에 회심의 미소를 띄우면서
향한 곳은 비디오 가게.
애들 방학동안 그동안 못본 비디오,
나도 실컷 봐야지...
아주 탁월한 선택 같았다.

한가지 잘못이 있다면 남편과 동행한 것이었다.
그는 보통의 한국 남자들처럼 액션을 표방한
폭력잔혹물만 골라서 본다. 나와는 취향이
정반대라는 이야긴데 그날도 별 주저없이 그가
골라든 테이프는 내용 뻔한 "미녀 삼총사"
속으로 앗차...했지만 아이들이 볼 만화영화
테이프를 같이 들고 그는 이미 가게를 나선 다음이었다.
어휴...이번에도 내가 당한 느낌이 드는 건 무슨 이유일까...

피가 튀고 살이 터지며 뼈가 꺾이는 폭력물 못지않게
남편이 좋아하는 것은 미녀들이 거의 벗다시피 나오는
오락물이다. 갈등구조도 없고 내용은 황당하면서
보고나면 괜히 봤다는 생각이 꼭 드는 시간 죽이기용...
애들이 없을 때나 잠든 다음에 보면 좋겠구만
자기 보고 싶을 때 아무 거리낌 없이 비디오를 트는
것도 너무 싫다. 애들한테 어떤 악영향이 있을지
전혀 배려하지 않는 무신경.

그날도 남편은 집에 오자마자 애들이 있는데서
비디오 테이프를 켰다. 자연히 애들은 TV 앞으로
모여 들고, 나의 우려와는 상관없이 영화는 시작되었다.
내가 국민학생일 때 육백만불의 사나이, 소머즈
종영되고 방영된 파라 포셋이랑 재클린 스미스가 나오는
미녀 삼총사는 아주 인기가 있었다. (여배우 한명은
생각이 안난다) 눈요깃거리에 첩보물을 살짝 덧씌운
내용이 나에게는 미녀들의 흥미진진한 100% 첩보물로
보였더랬다.

아이들을 못보게 할 엄두도 못내고 나도 그냥 TV 앞에
철푸덕 앉았다. 아이들은 디즈니 만화영화를 볼 때보다
훨씬 재미있게 비디오를 시청했다. 내용은 헐리우드
오락물 규칙에 충실하게 어떤 난관 속에서도 주인공들은
결코 죽는 법이 없는, 만화보다 더 황당한 것이었다.
비디오가 끝나고 나서 아이들은 환호를 질렀다.
말인즉슨 너무 재미있단다. 뭐, 몇번 더 볼테니 테이프
절대 갖다 주지 말라나?

그날 밤 아이들의 일기장은 미녀 삼총사 이야기로
도배가 되었다. 둘이서 거실과 자기들 방을 부지런히
드나들면서 나에게 물었던 내용들이 일기장에 고대로
옮겨져 있는 것이었다. 초등 1학년인 작은 아이는
그림 일기장에 인형을 세 개 그려놓고 각각의 머리에
화살표를 그리고 삐뚤삐뚤한 글씨로 이렇게 써 놓았다.


카메론 디아즈...루시 루...드류 배리모어...


물론 내가 가르쳐주긴 했지만 일기장에 적을줄은 몰랐다.
그리고 일기장에는 이렇게 씌여져 있었다.


세명 다 멋있지만 나는 루시 루가 제일 좋다....


아마 같은 동양인이어서 그런 생각이 든 모양이었다.
미국의 섹시 가이라는 닉 네임이 붙은 조지 클루니와
한때 살았던 그 중국 여자 말이다. 성룡 영화에
공주로도 나왔었지.
아이들은 테이프 반납일이 될 때까지 매일 두어번
미녀 삼총사를 반복해서 봤다. 사실 내가 봐도 재미는
있었다. 남는 것은 없는 내용이지만 말이다.

이 일이 있은 후 아이들은 내가 빌리는 테이프에 유독
관심이 많아졌다. 비디오 가게 가자...하면
엄마, 이번에는 뭐 빌리실 거예요?...하면서 같이 나선다.
미녀 삼총사 같은 테이프 빌리라는 재촉에 다름 아님을
나는 안다. 그래서 비디오 가게는 혼자 다녀오는데
집에 오면 둘이 번개처럼 테이프를 나꿔채고 확인부터 한다.


엄마, 이건 무슨 영화예요?

응...'패밀리 맨'이라고(니콜라스 케이지 주연) 하는
가족 영환데 현대판 크리스마스 캐롤이라고 생각하믄 돼...

야...그럼 우리도 같이 봐도 되겠네요? 그쵸?...

이건 '마이클'이라는 천사가 나오는 영환데(존 트라볼타 주연)
너희들이 생각하는 천사랑 완전 딴판인 천사래...


나름대로 성의를 갖고서 대답을 해준 것인데
아이의 대답이 걸작이다.


아이...그게 아니구요...전에 본 미녀 삼총사는
관람가 연령이 몇살이었어요?


세상에...관람가 연령도 알다니......


응...십 오세야....

그래요?...
그럼 패밀리 맨은 몇 살이에요?

응...그것도 십 오세야...

야...그럼 우리도 볼 수 있겠다....

너희들이 십 오세냐?

오호호호호호...엄마...
물론 저희들은 12-3세 관람가 비디오를 봐야겠지만
그건 너무 유치해요. 그렇다고 어른들이 보는 것을
볼 수도 없고, 십 오세가 딱 이예요. 비디오 보니깐요
십 오세가 딱 좋더라구요....


......할 말을 잃었다.


어제 빌려온 '마이클'은 내용상 야한 장면도
꽤 있는 것 같은데 아이들은 역시 십 오세이상
관람가 테이프라 하여 같이 볼 것을 기대하고 있다.
오늘 밤 아이들을 재우고 보기 위해 테이프는 얌전히
개봉을 기다리고 있다.

비디오 수입하시는 양반들,
요즘 초등생들이 좀 조숙, 영악 하우?
우리 아이 말 마따나 유아틱한 만화영화 말구
초등생들이 볼 수 있는 재미있고 세련된 내용의
비디오 좀 들여오슈.

더운 날 내가 깨달은 것은
아이들이 커도 육아는 여전히 어렵고도 어렵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