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에간 큰오빠에게서 첫편지가 날아 들었다. 큰오빠가 언제 군에 입대하였는지는 정확히 기억 나질 않은다. 어느해 봄인가 오빠에게 편지를 받고 우리 식구는 전부 눈물을 훔쳤다. 60년대 초이니 그때만해도 배고파서 탈영하고 매에 못이겨서 탈영하고 탈영하면 그사람의 인생은 한마디로 끝장이 나는, 고재봉이가 도끼를 휘둘러 전대미문의 살인극을 벌이던 그즈음이었다. 편지안에 명함판만한 사진을 동봉해서 보내?는데 너덜너덜 찢어진 군복바지를 입고 찍은 사진이었다. 어린게 무얼 안다고, 어린마음에도 얼마나 슬프던지... 할머니랑 함께 사진을 보면서 꺼이꺼이 한참을 울었다. 나와 큰오빠 그리고 할머니는 우리 세식구는 유난히 끈끈한 식구였다. 오빠가 대학 다닐때는 세식구가 함께 살았고 당시만해도 귀하디 귀한 다과점 케익에 동화책 그리고 장난감들... 구제품시장에 가서 이상야릇한 옷을 사다가 입혀서 고아원에서 주워온 아이처럼 만들어 놓곤했다. 당시에 남대문 도깨비 시장에서 구제품 옷을 구입해 코디해서 입는다는 것은 일류 멋쟁이들의 호사였다. "사랑하는 오빠에게 우리 식구는 모두 잘 지내고 있어요" 하는 위문편지를 몇번 보내고 난후 일년이 좀 넘었을까 오빠는 제대를 하고 나왔다. (그때는 뭔지 몰랐으나 나중에 의가사제대라는 걸 알았다) 오빠가 제대후엔 조카와(두살 많은 언니의 아들) 나는 완전히 군대식으로 길들여져 갔다. 콩댐과 니스로 몇번씩정성을 드려 만든 방바닥에서 공기는 물론 못하고 물한방울도 업지르면 호되게 야단 맞았다. 바람벽에다 낙서도 할 수 없었고 아침에 일어나면 이불각지게 개어놓기, 신문철에다 가지런하게 끼워놓기, 요강 내어다 부시기.. 엄동설한에도 방청소 할라치면 창문을 활짝열어 놓아 벌벌 떨게하고 (그때의 귀에 못이 배기게 들은 말은 방안 공기가 나쁘면 폐병 걸린다는 것이었다) 겨울에도 방바닥에다 이불을 깔아 놓지 못하게해서 방안에서도 동태가 될 지경이었다. 방이 사람 덕을 봐야할 지경이어서 차라리 밖에서 햇빛하고 노는편이 더 푸근했다. 왜 그리 엄격하고 무섭게 다루었는지... 그래도 집안의 대들보가 있어 든든하고 좋았다. 어른들이야 어떻던지 간에 우덜은 학교에 잘 다니고 별 애로사항없이 잘 커가고 있었다. 7순을 바라보는 노령의 할머니가 손수들 뒷바라지 하시랴 가게 꾸려 가시랴 힘드신 할머니따라 우물가에서 빨래도 거들어 드리고 쌀도 씻어드리고 곰살맞게 이쁜짓도 가끔은 하곤 했었다 학교에서 돌아와 "할머니 100점..."하고 시험지를 내어 보이고 :아이고 내 강아지..."하시면 궁둥이를 토닥토닥 두드려 주시는 할머니 품으로 파고들면 담배냄새와 살냄새가 범벅이 된 그냄새가 눈물나게 좋았다. 가끔씩 작은오빠가 내려와서 새로나온 학용품과 옷을 사다 주셨다. 학교에 오셔서 밀린 기성회비도 내어주시고... 막내오빠가 가끔 말썽을 부렸지만 그런대로 큰 아픔없이 초등학교 저학년의 시간이 흘러갔다. 매점을 했으니 군것질은 입에 달고 살았고(동네 애들이 부러워 했다는 후문) 나이든 오빠들이 있으니 필요한 것은 그때 그때 마련해 주셨다. (언제나 다른 색깔로 두개씩 조카와 칭아를 두지 않고) 부모님이 안계셔도 절대로 기죽지 않고 씩씩하게 자라며 조카와 키격태격 싸우기도하고 동무들과 산으로 들로 몰려다니며 공부보다는 노는것이 더 좋은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이었다. 공기놀이, 고무줄놀이, 말치기, 공놀이, 자치기, 썰매타기, 딱지치기, 구슬치기, 연날리기, 술래잡기, 줄넘기, 다방구놀이, 땅따먹기... 밤엔 여자들끼리 사랑방에 모여서 연극놀이, 노래자랑... 철따라 바뀌면서 놀거리가 얼마나 많았던지? 생각해보면, 생각해보면, 그리운 그시절이었다.
공기놀이, 고무줄놀이, 말치기, 공놀이, 자치기, 썰매타기, 딱지치기, 구슬치기, 연날리기, 술래잡기, 줄넘기, 다방구놀이, 땅따먹기... 밤엔 여자들끼리 사랑방에 모여서 연극놀이, 노래자랑... 철따라 바뀌면서 놀거리가 얼마나 많았던지? 생각해보면, 생각해보면, 그리운 그시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