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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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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남긴 것


BY ooyyssa 2003-01-01


멋지게 2003년을 시작해야지하는 나의 계획은 전화벨
소리와 함께 깨어지고 말았다.

"...또 갔어요."
작은 올케의 울먹이듯한 목소리.
기운이 쫙 빠진다.

내 동생의 도박병이 또 찾아 온 것이다.
평상시 정말 일 잘하고, 세심한 것 같은데, 어쩌다 도박판에만 들면
제 정신이 아니다. 하기야 몇백 몇천 만원씩 걸고 도박하는 사람들이
제 정신이기를 바라는게 이상한 일이다.

분명, '놀음'은 '놀이'와는 다른 무엇이 있다.
놀음판에서의 긴장과 희열은 그 무엇도 대신할 수 없다고 한다.
그래서, 마누라를 걸고 도박한 도박꾼의 이야기나
'도박꾼 손 자르면 발로 한다'는 말이 있는 것도
도박이 한번 빠지면 쉽게 헤어나지 못함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그래도 이해할 수 없고, 용서도 안된다.
왜냐하면 나에겐 도박꾼 아버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동생의 이런 얘기를 전해들을 때마다 벌써 흙이 됐을 아버지를
원망할 수 밖에 없다.

아버지는 양부에게 어마어마한 재산을 물려 받았다.
아무런 노력없이 주어진 많은 재산이 두려웠을까?
아버지는 도박을 시작했다.
하룻밤에 밭 하나씩 걸고..... 그 밤 아버지는 행복했을까?
할아버지가 평생 일군 재산은 석달열흘도 못 가 다 동이 나고,
오빠들과 언니를 데리고 나를 업고 소 달구지에 이불보따리,
솥단지달랑 싣고, 고향을 떠났다.

화려한 밤을 치른 댓가는 내 어린 시절 내내 지긋지긋한 가난으로
돌아왔고, 내 동생은 그 타향살이 중에 태어났다.

내 아버지는 평생 그날이 후회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나버린 과거는 과거대로 두어버리면 좋았을 것을,
돌이키지 못 할 것을 너무 깊게 후회만 했다.
도박은 더 걸것이 없어 그만 두었지만, 술과 신세한탄으로 젊음을
다 보내고, 그래도 자신이 만들어 놓은 질곡을 걷어내지 못해
헛된 것만 쫓아다녔다.

그래서 나는 두렵다.
도박에서 잃어버리는 게, 돈뿐이라면 좋겠지만 자신에 대한 사랑,
가족의 소중함, 땀의 소중함... 모두를 가진 것 모두를 잃게 만든다.

자라면서 내가 느낀 아버지,길에서 만나면 부끄러웠던 아버지,
일년에 한두달 집에 머물러 있는 시간이 지옥같다 느껴졌던
그 어린 날의 나처럼 내 동생이 그런 아버지가 될까 두렵다.
필요할 땐 한번도 곁에 없고, 돌아왔을 땐 무력한 존재가 되어버린
그 아버지의 그아들이 아니길.

아이는 부모의 뒷모습을 보고 자란다.
동생도 아버지를 지긋지긋하다 여기며 살았을 것이다.
그래서 고개를 저어 부정할수록 더 아버지를 닮아가고 있다.

나쁜 기억에 담담해지지 않는 한, 과거는 망령이 된다.
망령이 되어 바짓가랑이를 붙잡는다.
'나는 아버지와는 다른 삶을 살거야'하면서.
담담해져야 과거는 그 옭아맨 고리를 푼다.

정말 다른 삶을 원한다면,
지금 자신의 삶을 아버지와 연관시키는 일부터 그만 두어야 한다.
흔히 말하듯 지나간 날보다 남은 날이 많다.
지나간 것, 두고 온 것, 잃어버린 것에는 더 이상 연연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지금, 내가 가진 것을 돌아봐 감사하면 좋으련만.

따뜻한 가족과 일할 수 있는 일터와
돌아와 쉴 곳이 있는데 무엇을 더 가지겠다고!
'절대 안하겠다'고 하는 것은 언젠가 다시 하겠다는 뜻이다.
그 에너지, 그 돈, 그 노력 어디 좋은데 쓸 수 없냐며
나는 동생에게 전화로 한바탕 소리친다.

그러나...... 무엇이 문제일까?
어떻게 풀어야 할까 막막하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