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할머니 보고 싶어요" 무남독녀 외딸을 두시고 청상에 홀로되신 외할머니께서는 강원도 통천태생으로 가히 여걸이란 소리에 걸맞으실 만큼 호방하신 분이셨다. 6.25 사변 이전엔 큰오빠를 데려다 키우시고 사변이 난 후엔 고향의 재산을 버릴 수 없다고 버티시다가 삼팔선이 막히고 난 후 돈주고 사람을 사서 목숨을 건 대 탈주를 하셨다고 한다. 길라잡이를 대동해 몰래 야음을 틈 타 몇날 몇일을 삼팔선을 넘어서 따님과 함께 사시게 된 것이다. 길라잡이하는 사람이 고리짝 몇개를 갖고 도망 가서 귀중한 물품들을 도둑맞았다고 내내 분통해 하셨다. 장사수완이 좋으신 외할머니는 피난지인 부산에서도 이런 저런 장사를 하셔 돈도 짭짤하게 버시고 터전도 잡으실 정도셨다한다. 나의 아버지는 철도공무원으로 당시에 대통령표창과 철도청장의 표창까지 받으신 상당히 강직하신 분이셨는데도 불구하고 장모님 앞에선 얼굴도 바로 못 볼 정도로 장모님을 어려워하셨다. 동족상잔의 피비린내 나는 포화속에 부산에서 이삼년을 보내고 발령을 받아 둥지를 튼 곳이 내가 태어난 수도권인 지금의 고양시이다. 그때 우리집은 두 집 살림살이는 했었는데 역장인 아버지 앞으로 할당된 철도관사에서는 대학교에 다니던 큰오빠와 외할머니 그리고 나 일도와 주는 언니도 가끔은 있었다. 정거장 앞에 새로 지은 매점집에는 아버지와 오빠 둘 그리고 청상에 과부되어 아들과 함께 친정살이를 하고 있는 언니가 식구들 치닥거리를 하고 있었다. 심장병이 있는 상태에서 늦둥이인 나를 생산하시고 6년여 동안을 병원에서 집으로 왔다 갔다를 반복하시다가 4.19가 나던 해 그달, 오빠들이 학교에 간 사이에 올망졸망 어린 자식들을 남겨놓고 눈도 감지 못하시고 운명하신 것이었다. 돌아가실 연세가 지금의 내나이정도이니 살아도 한참을 사실 나이였는데.. 엄마가 일찍 돌아가신 원흉이 두여자(언니와 나) 때문이라고 언젠가 오빠가 넋두리처럼 하신 말씀이 떠오른다 사범학교 다니다 부산으로 피난가서 난리통엔 여자가 위험하다고 피난지에서 부랴부랴 결혼을 시킨 딸이 채 삼년도 안돼 과부가 되었으니 기절하고 통탄할 노릇이 아니였겠는가? 그런 와중에 10년 터울로 내가 생기고... 사람이 낳고 죽는 일을 맘대로 못하는 일이라지만... "난 어린 자식 놔두고 절대 죽지 않을꺼야 그건 죄악이야..." 자식을 낳아보고 그나이가 되어보니 자식을 두고 가는 어미의 마음이 얼마나 쓰렸을까 가슴 한귀퉁이가 서늘해진다. 엄마가 돌아가실 즈음 할머니께선 무슨 수술을 받으시고 한집에 아픈사람이 둘이 있으면 안좋다는 말이 있어서 수양아드님 되시는 집에 피병을 가셨었다. 할머니가 엄마나 다름없는 나는 할머니의 잔심부름과 본가를 오가며 연락병 노릇을 했었다. 어머니의 죽음을 절대 알리지 말라는 엄명을 받고는 한참동안을 일급비밀에 붙이고.. 얼마간은 쉬쉬하며 지냈지만 청상에 과부되여 눈치가 9단인 할머니를 속이는 일은 오래 가지 못하였다. "순덕아 순덕아 네년이 에밀 앞세워 먼저 가다니.." 심장의 끝에서 터져나오는 동물의 본능과도 같은 처절한 울부짖음을 우리 남매는 엄마 돌아 가신후 몇년 동안을 더 들어야만 했다. 아들이 없음을 그리 애통해하시더니 당신도 아들하나 낳아서 잃어버리셨다고 60년이나 차이나는 손녀에게 입버릇처럼 말씀하시더니..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말, 외손주를 귀여워하느니 방아깨비를 귀여워하라"고 하는 옛말을 입증이나 하듯이 아무도 관심을 기울여 주지 않는 가운데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외손녀의 곁에서 쓸쓸히 최후를 마감하셨다. 아... 꿈에도 차마 그리운 나의 외할머니... 나를 낳아주신 분은 어머니시지만 나의 태를 갈라주시고 나를 키워주신 분은 나의 외할머니입니다. 내 인생에 가장 큰 스승이였던 나의 외할머니... 새록새록 그정이 그립습니다. 다음세상에 다시 뵈올 수 있다면 머리를 짤라 신을 삼아 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