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내린 비로 거리가 촉촉히 젖어있다.
희뿌염한 안개비가 한낮인 아직까지도 내리고 있어서
마치 비오는 늦가을을 연상하게 되는 날이다.
어제의 하늘은 얼마나 맑고 투명했던가..
결혼기념일을 즈음해서 여행을 하자고 남편과의 약속이 있었다.
조촐한 겨울여행을 토요일에 출발해서 일요일 차 막힐 시간보다
일찍 돌아오자고 했었다.
그런데 남편이 토요일에 예정에 없던 약속이 있어서
일요일 아침 일찍 서둘러 여정을 챙기고 길을 나섰다.
다행이 내려가는 길이 막히지 않아서 11시경엔 이제 막 시작되는
해미읍의 장을 구경할수가 있었다. 장날의 여러가지 풍경중에
눈에 띄는건 서리맞은 감을 쌓아놓고 있는 상점이었다.서울에선
어느 재래시장을 뒤져도 볼수 없을것 같은,
감인지 고욤인지 유난히 작은 열매를
늘여놓고 있었는데 서리맞은 감 특유의
짙은 주황색을 띠고 있는게 참으로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겨울치고는 날이 포근했던 일요일은
하늘이 투명하게 맑았고, 흰구름까지 한가롭게 떠다니고 있어서
하늘만 바라봐도 기분이 상쾌해지는 날이었다. 지난해에 들러보았던
낙안읍성엔 아직도 주민들이 살고 있는 것에 비해
해미읍성엔 사람이 살고 있지 않아서 쓸쓸한 느낌이
많았던것 같다.
성입구를 통과하면서 올려다본 홍예문은
언제 보아도 참으로 신기한 옛사람들의 건축물이라 생각을 한다.
작은 돌도 아니고 크다란 각기 다른 모양의 돌을 아귀를 맞추어
둥글게 연결해서 입구를 만드는 일은 정교함과 과학적인 사고를
요하는 대공사였을 것이다. 여러번 다시 쌓기도 하고
사람이 다치기도 했을 것이란 생각이 들어 유심한 마음으로
홍예문을 올려다 보았다.
그리고 우리를 맞아준건 300년된 '호야나무'라는 생소한 나무였다.
등걸이 매우 울퉁불퉁하고 다소 으스스한 느낌을 준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나무가 조선시대때 천주교인을 고문시키던 나무란다.
그곳에 교인들의 목을 메달고 고문을 했다는 흔적이 아직도
군데군데 메달린 철사줄이 증명해 주고 있었다.
나무 오른쪽엔 그옛날에 교도소자리가 흔적으로 남아있었어서
더욱 마음이 바싹 죄어 오는데 바람소리가 마치
당시의 천주교인들의 비명같다며 옆에서 남편이
분위기를 더욱 스산하게 만들었다.
여름이면 무성한 잎을 달고 한껏 뽐내고 있었을 아름드리 나무들이
성안 여기저기에 서있었다. 은행나무 노각나무 전나무,... 그리고
토종소나무들이 한겨울인데도 우람한 모습으로 서있어서
반가웠다. 어디를 보느냐에 따라 여행지의 이미지는 천차만별일수
있을 것이다.
각기 저마다의 모습으로 가지를 뻗어나간 솔숲이 아름다웠으므로
그곳이 멋진여행지였다고 생각한 것처럼..
그리고 가장 원시적인 초록색을 품고 고고한 기품으로 서있는
소나무를 감싸듯 서있던 억새밭의 하얀 꽃무리가 여전히 예뻐서
한동안 발길을 옮기지 못했으니 그 또한 이번 여행의 멋진
추억이 되었노라 생각하는 것처럼 말이다.
소나무의 짙은 초록색과
억새밭의 하얀꽃무리가 참으로 조화로웠다.
사진을 찍고 잠시 동심으로 돌아가 아이들이랑
숨바꼭질을 했다. 어른 키높이로 자란 억새가 띄엄띄엄
딱, 숨바꼭질하기에 좋게 무리지어 있었다.
얼마만에 해보는 숨바꼭질인지... 남편이 술래가 되자
억새밭 가장자리에 들어가 있는 동안의 그 숨막힘이라니..
제깐에는 숨는다고 한 아이들의 엉덩이가 억새밭 사이로 살짝
삐져나와 있던 귀여운 모습이라니....
아이들은 말소리를 내서 들키고 뒷모습을 보여서 들키고는
그래도 자꾸만 더 숨바꼭질을 하자고 졸랐다.
억새밭을 지나고 소나무숲을 에워싼 대나무 숲을 지나면서
대나무의 푸른잎이 불어오는 사람에 서걱이는 소리로
마음의 때를 씻고, 성벽을 따라 아슬아슬한 30센티 폭의 성벽위를
돌면서 한해의 건강을 소망해 보기도 했다.
해미읍성을 나와서 개심사까지의 길은 참으로 한가했다.
개심사에 우리만 가는건가 싶을정도로 말이다.
개심사를 얼마 앞두고 참으로 이상한 정경을 마주했다.
산들이 하나같이 나무하나 없는 벌거숭이 산이었던 것이다.
그것도 도로 양옆으로 난 모든 산들이 하나같이
벌거숭이 모습으로 서있는 모습을 보고 아연을 했는데
유신정권때의 실세였고 지금은 한 군소야당의 총재인 사람이
그곳을 사들여 목장을 조성하느라
그리 만들었다고 남편이 설명해 주었다.
벌거숭이 산을 그만 보았으면 싶었는데 끝도 없이 따라오는
삼육목장이라는 헐벗은 산은 겨울이라 소한마리는
커녕 동물이라고는 한마리도 찾아볼수 없는 삭막함으로
그곳을 가는 내내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마음을 열어야 하는곳 ,마음을 열어보일수 있는절,개심사...
절입구에서 차를 파는 아저씨를 만난 순간부터 마음이 조금씩
열리는듯했던건... 절을 찾는 사람들을 위해 계단에 떨어진
낙엽을 쓸고 계셨기 때문이다. 직접 집에서 담았노라며
모과차를 마셔보라고 했다. 아이들이 어묵을 먹는 동안
가래떡을 썰어서 조청에 찍어 먹어 보란다.
얼마만에 먹어보는 조청맛인지... 아직도 김이 모락모락 나는
가래떡을 조청에 찍어 먹는 맛이 '꿀맛'이었다.
나어렸을적에 할머니가 만들어 주시곤 했던 그 조청의 맛 그대로였다.
개심사는 생각보다 작았지만 오밀조밀한 구조가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룬 곳이란 느낌을 받았다.
살얼음이 언 연못을 가로지르는 외나무다리를 건너
아직 녹지 않은 눈을 발아래 깔고 있는 배롱나무를 만났다.
백일동안 피워낸 꽃만 떨어뜨린게 아니라
가을엔 단풍들었을 나뭇잎만 떨어뜨린게 아니라
온몸의 수피를 다 떨구어낸 처연한 모습의
배롱나무를 보았다. 나무 본연의 속살을 다 드러내놓고
차가운 겨울을 나는 배롱나무를 본 순간 가슴에 뭔가 뭉클한게
들어와 앉은 느낌이었다. 일없이 배롱나무를 쓰다듬는데
옷을 벗은 속살은 어찌 그리도 매끄럽던지.....
스님들이 손수 가꾸어 놓은 텃밭엔
선택받지 못한 배추가 언채로 밭가장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고,
창고인듯한 건물이 밭가에 서있었는데
있는돌은 무조건 쌓아둔것 같은 돌집이
투박하면서도 묘한 안정감을 건네 주었다.
산신각까지 별로 가파르지 않는 길을 올라서
부처님께 합장도 해보고 산아래 오늘따라 푸르게 펼쳐진
하늘아래로, 아직도 가지가 휘어질듯 감을 매달고 있는
감나무에 작은새들이 와서 감을 쪼아먹는걸 보았다.
그냥 한번, 지나가는 스님께 여쭤보았다.
'감을 따먹어도 되는지...'
할수만 있으면 감나무에 올라가서라도 따먹어 보세요.. 하시며
빙긋 웃으셨다..
아마도 고욤이었을 것이다. 남편이 나뭇가지를 던저 작고 주홍빛나는
열매를 떨어뜨렸다. 해미읍성에서 보았던 바로 그 열매다.
적당히 수분이 빠져있는 고욤은 익히 들었던 대로 무척이나 달콤했다.
아이들의 성화에 못이겨 마침 옆에 있던 긴장대로 가지를 치자
우르르 열매가 떨어짐과 동시에 그곳에 와 있던 다른가족들이 합세를
했다.. 아이들은 신이났고, 저마다 하나씩 집어 먹어본 어른들도
얼굴에 함박 웃음이 묻어났다.
개심사의 해우소를 찾아가는 작은 오솔길 양옆엔
단풍나무가 진자리는 분홍색이불을
은행나무가 진자리는 노랑이불을 깔고 있었다.
아래가 내려다 보인다며 아이들은 질겁을 했지만
지난 봄 선암사의 해우소를 한번 경험해 보았던 터라
순순히 해우소에 들러 볼일을 보았다.
하룻동안의 짧은 여행을 마감하기엔 너무나 아쉬운
이번 여행이었지만 다음을 기약하는 마음엔 다시 설레임이 인다.
꽃이피고 잎이 피는 봄이나
녹음이 무성한 여름날 다시 한번 찾아가 볼 생각속으로
수피를 입고 작은잎새를 무성히 달고 분홍색꽃을 피워내고 있을
개심사 연못가의 배롱나무를 떠올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