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때도 이러진 않았는디..."
"이나이에 새로 뭔갈 시작하려니 용기가 나질 않어."
"자기 몸도 그렇구."
어제 저녁 식탁에서 남편은
심각한 표정이 되어,
이마에 접혀있는 깊은 주름에 군살을 더 붙이고 있다.
계절을 타는 장사인지라
늘상 겨울이면 한두번 지나가는 갈등이겠거니 하고
몇번 지나쳐 들었었는데,
그이의 진지한 표정이나 심각한 어투가
이번엔 그냥 넘겨서는 안되듯 싶다.
"돈이란게 어디 끝이 있어요? 많으면 많을수록 더 갖고 싶어지는게
돈이라는데, 덜 쓰면 되니까 그렇게 한숨 내쉬지 말아요.
집 무너져요."
나야 아껴쓰는덴 이골이 나있는 사람이고,
남편 역시 한푼도 개인을 위해선 돈 쓸일이 없는 사람,
우리 둘만 같음 여기서 멈추고 그냥 살라해도
아무걱정 없겠지만 큰돈 쓸일만 매달고 있는 애들과
언제 어찌 될지 모를 어른들이 세분이나 계시니,
생각하면 할수록 걱정이 되는줄 왜 내가 모르겠는가!
그렇다고 덩달아 걱정하면 뾰족한 길이 보이는게 아닌데
마음이라도 편안해야 건강을 해치지 않을 것 같아,
나는 요즘 남편 앞에선 부처님 가운데 도막(?)이 되어
세상사 모두 통달한 사람처럼 입으론 한없이 자애롭고
편안한 마누라 노릇을 하고 있다.
'애들 인생은 이제 지들이 책임질때예요."
"부모의 의무는 작은애 학교만 마치면 다 한거잖아요?"
"부모님이야 우리 사는대로 모시면 되는거고."
"집있고 차있고, 자식있고 부모있고, 또 시골집까지."
"자기, 그동안 내게 협조 잘 해줘서 고마워요."
"난 지금에서 만족해요.자기 돈 벌어 오라고 안할테니 걱정 말아요."
"더 이상 욕심부리면 우리 만큼 못한 사람에게 죄스런거예요"
.
.
.
입에 발린 소리가 아닌 그 순간 만은 정말 진심 담긴 소리로
남편을 구슬러 오늘 편안히 내 보내 놓고,
혼자 조용한 시간에 나의 내심을 들여다 본다.
정말 내 깊은 곳의 마음도 그럴까?
나의 애들이 결혼을 하려면
방이라도 마련해줄 정도의 능력은 되어야 할것 같고,
나도 가끔은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음식을 폼나는 곳에서 사 먹으며
편히 사는 사람들을 부러워 해 보기도 했었는데....
다 접어 놓더라도 내 노후는 편안해 지고 싶은데....
끝없고 대책없는 욕심들을 꺼내놓고 세어 본다.
좀전에 다녀간 남편의 친구인 이선생님,
"친구 어디 갔어요? 한참만에 얼굴좀 보러 왔더니...."
"오늘 쉬라고 제가 나왔어요."
그이가 없으니 혼자 앉아 있기가 머쓱한지
곧 나가 버리는 뒷모습에다
마음속에선 나도 모르게 손가락 옴짝거리고 숫자를 센다.
"아직은 정년을 오륙년 정도 남겨두고 있으니
저런 남편을 두고 있으면 아직은 걱정 안해도 되겠지."
난로 옆 의자에서 꺼냈던 몸을 되 넣으며
흠? 혼자 놀라 헛 웃음을 지어 본다.
별수 없는 여자이면서 가끔은
천연덕스럽게 남편을 달래 주다가,
또 위로도 해 주기도 해가며
전형적인 양처 노릇을 하다가도
변덕나면 소리 벅벅 지른는 악처로 돌변하는 내게
남편의 깊은 마음속 감정은 어떨까?
"나도 모르는새 마누라의 틀에 끼워지며
마누라에게 젖어 들고 있더라"
그이 친구들과 하는 대화에서 우연히 흘려 들었던 말처럼
우리는 누구나 가족의 서로에게 끼워서 맞춰지며
젖어 들며 사는게 맞을진데
유독 나를 맞추느라 그이가 힘들었던 것일까?
나도 남편을 내사람 만드는데
그리 쉽지는 않았었던 세월였던것 같은데....
돈 보태주러 오는 손님은 하나도 없는 가게에
단골손님들이 간간이 들려 담배를 잔뜩 피워 대다가
가게안 가득 연기만 자욱히 채워 놓고 간다.
목이 깔깔해서 연기를 빼려고 가게문을 여니
아침보다 많이 풀린 날씨가 바람의 느낌도 한결 부드럽다.
며칠 추웠으니 이젠 또 며칠 따뜻하겠지.
허한 마음으로 며칠을 보낸 남편이
오늘 온종일을 혼자 보내고 늦게 돌아 왔을땐
언제 마음앓이를 했었다는양
내게 소리 지르며 들어 왔음 좋겠다.
"자갸, 우리 오늘 오인리 가서 잘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