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얼마나 속을 끓이고 있는지 짐작이나 하고 있는 거야?
말의 안장위에서, 규칙적으로 한발씩 뒤로 멀어져가고 다시
다가오는 숲속의 아침을 바라보며, 그간 뭔가 이상했던 자세를
조금씩 교정하면서 천천히 마장안을 맴돌다가, 다른 매일과는
조금 다른 풍경으로 어! 하고 보니 두 마리의 말이 빗장을 풀
고 초원에서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었습니다. 보기엔 평화로
운 그림이지만 다시 말을 마장안으로 다시 몰아 넣기는 쉬운
일이 아닐것이라는 직감이었습니다. 마방굴레를 들고 다가가
니, 역시 숫말이 앞발을 들며 하늘로 치솟습니다. 토마토 밭
을 뭉개며 순식간에 2m가량 뛰어, 아니 날아 지나갑니다. 등
줄기에 땀이 주욱 흐릅니다. 우측에서부터 천천히 다시 다가
가 잡으려 하니 이젠 스스로의 도약 능력에 자신이 생기고 어
느정도 재미도 붙었는지 제법 흥분하여 뛰기 시작합니다. 곁
에 있던 암말도 함께 뛰고 이젠 축사 안에 있는 말들까지 뭔
가 이상한 분위기와 요란한 발굽소리를 알아 채었는지 함께
좁은 공간에서 푸르륵! 거리며 흥분합니다. 다 함께 껑충거리
며 주위를 뛰어 오릅니다. 나 자신의 생명에 대한 불안을 느
낍니다. 나 역시 영장류의 동물에 분류되므로 안전에 대한 강
한 의혹과 함께 오기와 흥분이 교차 됩니다.
말은 갈기를 흩날리며 안개가 자욱한 새벽 공기속을 공처럼
뛰어 오르고 그들은 그 순간 자유롭습니다. 본래의 야성을 찾
은 것인지, 무척 날카롭게 아름답다고 느낍니다. 축사에 갇혀
있는 것보다 훨씬 우아하고 강하고 두려운 존재로 다가 옵니
다. 아름답게 도약하는 말을 50Cm 곁에서 바라본다는 것은 아
찔하고 흥분되는 일입니다. 나는 감동하고 있슴을 느낍니다.
다이빙대에서 뛰어 내리기 직전이나, 시속 230Km로 직선 주행
을 하거나, 두터운 얼음이 깔린 미끄러운 겨울 암벽에 매달려
0.5초의 판단이 필요할 때와 많이 비슷합니다. 두 마리의 자
연 상태의 말이 주변을 뛰어 오릅니다. 엉덩이 쪽이 나의 정
면을 향할 때마다 금방이라도 뒷발질을 할 것 같습니다. 편자
가 박힌 그 단단한 발굽을 기억합니다. 지난주에 함께 편자에
못을 쳤으니까요. 오스스 소름이 돋고 팔이 가볍게 떨리는 것
을 느낍니다. 그러면서도 나는 나자신을 자꾸만 말쪽으로 몰
아갑니다. 머리털이 뻣뻣이 서는 것을 느낍니다. 말의 두 눈
엔 이상한 광체가 어리는 것 같고 재갈을 물리던 때의 그 온
순한 표정이 아닙니다. 두렵지만 지고 싶지는 않습니다. 나는
듯이 뛰는 그들의 앞에서 무력하고 싶지 않습니다. 마방굴레
를 더욱 힘주어 잡고 거리를 좁혀 갑니다. 잠시 풀을 뜯던 그
들은 놀랄만치 빠른 동작으로 나를 다시 자신들의 뒤편에 세
워 둡니다. 팽팽하게 잡아다닌 실 같은 육감과 육감이 불꽃을
튀며 말과 나 사이를 계속 쉿쉿! 지나 갑니다. 나는 강하고
아름다운 것을 잡아야 합니다. 상상보다 훨씬 어렵고 현실보
다 더욱 위험합니다.
이번이 네 번째 이별이군. 이게 우리의 진짜 마지막이 되길
바래. 당신은 현미경으로 보아야 할만큼 고개를 끄덕였습니
다. 그것은 진짜로 고개를 끄덕인 것인지, 머리를 숙인 채 가
늘게 숨을 쉬어서 인지는 잘 알수가 없었습니다. 창밖으로는
북한강이 깊어지는 가을을 닮아 가며 하품이라도 하듯이 머물
러 있습니다. 사진과 짐들은 조만간 돌려 줄게... 당신은 창
이 단단히 잠긴 겨울 강가의 카페에서 잠시 아지랑이를 보지
않았나 싶을 정도로만 고개를 저었습니다. 아니 저었던 것 같
았습니다. 빨간 잠자리 한 마리가 잠시 우리를 들여다 보며
허공에 멈추어 있습니다. 나는 당신이 무슨짓을 하고 있는 것
인지 모르겠어. 그리고 나역시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
고... 지난번 제주도에서 돌아오면서 뭐라고 했는지 기억이
나? 불과 두 달전에 어떤 일이 있어도 헤어질 수 없으니까 도
망이라도 가자고 하던 사람이 당신이 맞나 모르겠군. 당신이
정말 그때 그사람이고 지금까지 내가 사랑했던 그사람이 맞는
건가? 계속 창안의 우리를 바라 보던 빨간 잠자리가 갑자기
방향을 바꾸어 팟! 하고 사라져 버립니다. 소박한 꽃 무늬가
새겨진, 손도 안댄 채 차갑게 식어버린 그 커피잔 언저리로
툭! 하고 눈물이 떨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찌나 굵고 진
한 눈물인지, 처마에서 댓돌위로 구르는 빗방울 같이 보였습
니다. 하얀 빛줄기가 검게 번진 마스카라를 지나 당신의 볼을
타고 달립니다. 그렇게 당신은 당신이 좋아하던 로뎅의 조각
상이라도 된 듯이 움직이지 않고 있었습니다. 다시 시간이 우
리 두 사람 적막하고 메마른 공간으로 침묵하며 느릿하게 지
나갑니다.
그래 우리는 생명을 걸고라도 함께 하기로 했었지, 하지만 지
금 우리는 죽어서 서로의 영혼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야. 그
리고 더 이상 어떤 문제도 없다는 것은 인정하지? 이젠 두 사
람의 의지와 약속과 사랑에 대한 문제이겠지. 당신이 나를 사
랑하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야. 당신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는 나도 잘 알 수 있어. 그걸 어떻게 모를 수가 있겠
어. 어느 누구도 나를 당신만큼 아껴주지는 못할거야. 당신은
너무나 여자이니까... 나 역시 누군가와 다시 이렇게 사랑 할
수 있을른지는 정말 모르겠어. 하지만 모든 것이 너무 혼란스
럽군. 당신은 또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면 그렇게 전화해서 끊
어 버릴지도 모르지만 나는 이렇게 소모하는 시간 때문에 정
신이 나가 버릴 것 같아. 내가 얼마나 속을 끓이고 있는지 짐
작이나 하고 있는 거야? 천천히 두 손을 들어 올린 당신은,
마침내 당신의 얼굴을 가려 버리고 말았습니다. 당신의 눈동
자 어귀에서 출발한 빛 줄기는 다시 당신의 팔을 타고 팔꿈치
에서 ?셜貪?시작합니다. 그리고 나는 당신의 얼굴이 조금씩
흔들거리고 흐려지는 것을 느낍니다. 우측으로 고개를 돌려
텅 비어 있는 페치카의 검은 구멍을 들여다 보았습니다. 장작
에서 탄생한 검댕이 갈색 벽면을 점령하였습니다. 지난 겨울
이곳에서 당신과 함께 오렌지색 불꽃을 보며 미동도 않고 있
었지요. 코 끝이 당기고 아파 옵니다. 자꾸만 마른 냄새가 미
간을 떠 돕니다. 나는 분노하고 있었지만 분노하고 싶지 않은
마음과 분노하는 싶은 마음이 양손의 끝에서 마주쳐 결국 무
릎 언저리의 바지를 단단히 구겨 잡고 말았습니다.
산머리에 걸린 구름이 조금 빠르게 움직이는 것을 보았습니
다. 당신은 온몸의 수분을 모두 다 뱉어 내듯이 긴 시간을 움
직이지 않았고, 나는 오른쪽의 페치카와 강너머 산아래를 달
리는 자동차와 수면에 반사되어 반짝이는 햇살을 보고 있었습
니다. 인생에서 의지대로 되지 않는 고집센 것은 의외로 나를
가장 사랑하던 바로 당신이었고 나는 당황하고 있었습니다.
헤어질 사람은 언제인가는 헤어지겠지요. 믿을 수 없는 일도
때론 일어납니다. 그러나 만나야 할 사람이니까 우리는 만났
겠지요. 당신을 사랑하여 아니 우리가 사랑하여 위험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나는 한번도 이별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늘
고집스럽게 거절하였지만 결국 당신을 품에 안고 함께 기뻐
하고 함께 슬퍼 하였습니다. 그렇게 제자리였고 빈 가슴이었
습니다. 나는 당신을 기다리는 내가 싫었고, 내가 그러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떠남을 고집하는 당신도 싫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반복하는 이별의 상황도 더 없이 싫었습니다. 마음속
으로 수 없이 당신은 별 것 아니야 그냥 여자야. 나는 당신과
이별하지 못할 이유가 없어 라고 말하였지만, 당신은 늘 아름
다운 별 것 이었고, 사랑스러운 여자 였었고, 이별하지 못할
이유가 가슴 깊은 곳에서 헤아릴 수도 없이 자꾸만 생겨 나고
말았습니다. 당신은 떠나려 하고 있었고, 자유로와 지려고 하
고 있었고 변함없이 아름다웠습니다. 나는 돌아오는 어음과
당신을 동시에 잡아야 할 운명이었고, 빙그레 미소를 짓고 있
을 운명은 좀 더 강한 시련을 내게 차례로 보내고 있었습니
다. 나는 펄펄 뛰는 주변의 상황을 잡아야 했고, 부글거리는
잠재된 위험들을 억눌러야 했습니다. 잠시 당신을 잊을 정도
로 지독한 시간들이 끔찍하게 지나갔습니다. 나는 지쳤고 상
처를 입었고 상심하였습니다. 나는 점점 느리게 길을 걷고 있
었고, 때로 상처에 소주를 붓고 있었습니다.
몇 일후 이리저리 뛰어 간신히 피치 못할 사정들을 정리하고,
허리 잘린 풀처럼 되어 수트 소매자락의 버튼을 허리에 느끼
며 무너지듯 침대에 걸쳐서 있을 때 전화가 울렸습니다. 여보
세요? ..... 수화기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고 나는
귀에서 윙윙 소리가 울리는 것을 듣고 조금 어지러워 졌습니
다. 전화기를 잡은 오른손에 힘이 풀리는 것을 느끼며 나는
돌아 누웠고 침대 아래로 전화기가 굴렀습니다. 나는 그대로
침대와 함께 빙글거리며 끝도 없는 심연으로 침몰하는 나 자
신을 바라 보고 있었습니다.
이제 하루의 뒷 모습이 뚜렷히 보이는 시간 입니다. 가만히
시간을 되새김질 하여 봅니다. 그래요. 그러니까 오늘은 그런
대로 괜찮은 날이었습니다. 이런저런 일들이 많이 바쁘게 정
신을 돌려 놓아서 생각나지 않기를 바라는시간이 그런대로 얌
전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으니까요. 실수로 사진이 튀어 나
오지도 않았고, 기억이 유리조각 처럼 흩어져 있는 거리를 지
나지도 않았네요. 대부분 차를 타고 지나가는 데에도 맨발로
지나는듯, 온 몸이 타오르는 것처럼 오그라 들곤 하기 때문에
어쩌다가라도 그런쪽으로 가게 되면 별루입니다. 하지만 오늘
은 그런 일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소라안의 집게처럼 안
전 하였습니다. 나는 나자신의 안전핀을 꼬옥 잡고 있어야 필
요를 느낍니다. 때로 통제 불능이 될 때가 있으니까요. 그런
때는 늘 당신의 핑계를 대곤 하는 나 자신을 어이없어 하며
돌아 보게 되니까요...
세그루의 소나무 아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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