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일용할 행운!
저녁이 노을을 이끌고 빌딩숲의 간판을 따라 다가오고 하루
는 반대편 식당들의 간판 사이로 멀어져 갑니다. 어쩐지 우
울한 습기를 칭칭 휘감고 있던 하루여서, 맨손으로라도 공기
를 쥐어짜면 주르륵! 물이 흐를 것 같은 그런 하루였습니다.
머리속에도 관절이 있다면 틀림없이 류머티즘에라도 걸린 기
분 일테지요. 해서 막걸리를 떠올린 것은 우울한 그림자를
회색 건물의 벽으로 길게 터벅터벅 끌면서 퇴근길에 나선 술
꾼들의 특권이라고 할 만한 일입니다. 축축한 대기와 찌푸린
시간이 어찌나 자연스럽게 막걸리를 떠올리게 하는지, 파블
로프의 개라도 된 것 같은 그런 심정입니다. 머리 어딘가에
구멍이 뚫리고 벨소리를 들으면 침을 주르륵 흘릴 가엾은 실
험용 개요… 아니라면 꼬리를 흔드는 절박한 친근감인가요?
그리하여 과학의 산물로 덕지덕지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누구나 실험용 인지도 모릅니다.
틀림없이! 새로운 소주(소주는 식품이상의 정신의 고양을 위
한 링겔이므로 따로 특수 분류!) 나 식품이 나오면 분명히
과학은 데이터를 요구할 것이고 어떤 형태의 통계든 그래프
든, 우리가 알던 모르던 컴퓨터의 수치의 형태로 분석되어지
고 입력 되어지고, 분류 되어지고, 그러므로 실험 되어 질
것이고 번쩍이는 검은 책상위에서 검토 되어 질 것입니다.
때로 이 孤島(고도)정보사회에서도 개인적이고 인간적인 자
기 주장이 가능하지요. 충분히 운이 좋다면, 그리고 도시인
다운 복장과 나름대로 부드러운 미소를 가지고 있다면, 적어
도 살려는 의지를 가진 결연한 칼레의 시민다운 표정이라도
지니고 있다면, 거리에서 만난 1,000명의 시민중의 하나가
되어, 3)그저그렇다. 라는 식의 김빠진 콜라 같은 그런 질척
질척한 자기 주장이요…
누군가의 부탁으로 나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기업은행을 찾
을 일이 있었습니다. 은행이란 은행은 모조리 일렬로 모여
사열을 하고 있는 것 같은 거리에서 오직 내가 찾는 그 기업
은행만 없더군요. 아니 난감함으로 어지러운 머리속의 대뇌
피질 주름의 난해함 보다는 어렵지 않게 발견하긴 하였습니
다. 걷는 길의 방향으로 두 블럭이나 떨어진 곳에 휘장 같은
프랭카드를 걸고 기업은행은, 나 여기있다. 그러니까 올 테
면 와봐라! 하는 식의 분명한 모습으로 그리고 제법 근엄하
고 엄숙하게 국내 기업의 미래를 짊어 진듯한 얼굴로 버티고
있었습니다. 언제나 처럼 내가 찾는 어떤 것이 제일 마지막
에 나타난다의 법칙! 오래전의 수첩에 적어둔 기록 따위라면
앞에서부터 찾다가 질려서, 다시 뒤에서부터 찾아 가노라면
언제나 가운데 쯤에 틀어박혀 있는 불운... 그래두 이렇듯
구체적으로 나타날 것 까지는 없잖아! 하는 조금 불만 어린
입술이 되어 있을 것이 분명한 것은, 내가 지닌 어두운 Dark
Slate Grey의 눈매가 소시민 임에 분명한 쪽과 87% 이상 닮
아 있기 때문이겠지요.
이런 사소한 불만은, 분명히 같은 시간에 같은 전차를 타고
비슷한 책을 읽으며 고만고만한 잡지의, 스타와 스타일 코너
나 무더운 여름을 블루 메이크업으로! 같은 코너에서, 고만
고만한 화장법을 익힌 비슷비슷한 표준 미모의 여인들의 틈
에서 목표지점에 도착한 뒤, 전철의 앞에서 내리지 않고 뒤
로 내렸다는 아주 사소한 차이에 의하여 두바퀴의 우측으로
360도 회전, 그러니까 길고 긴 네칸의 계단을 헉헉!거리며
올라 왔을 때, 돌로 된 지하철의 입구에서 보이는 막연한 하
늘, 결국 아주 사소한 차이에서 출발한 전혀 다른 간판들의
숲에 어리둥절 서있다는 일그러진 황당 같은 것이겠지요. 아
마도 물이 주르륵! 흐를 것만 같은 대기의 탓이거나 머릿속
의 류머티즘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입니다. 해서 막걸
리를 떠올린 것은 파블로프의 개가 침을 흘리는 것과 같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돈이 필요해서 강도를 하였노
라! 너도 나같이 배고파 봐라. 하는 당당한 주장같은 뭐 그
런 자연스러움이요...
조금 일찍부터 시작한 술자리는 막걸리반 소주반 그리고 엉
망이 되어버린 소시민의 근심과 처진 어깨가 각각 절반 씩입
니다. 그러니까 200% Down된 기분이고, 알다시피 한글키로
돌려 놓고 영문으로 DOWN[愛酒(애주)]을 눌러 보시면 왜 우
리가 술로서 가라앉은 기분을 풀어야 하는지 잘 아실 수 있
을 것입니다. 우연히도 그렇게 된것이지만 때로 세상은 뜻하
지 않게 그런 식의 교묘한 농담을 걸어오곤 합니다. 돌아오
는 전철에서 넘겨다 본 신문에는 네명의 회사원이 깜짝 놀라
는 표정을 짓고 있었습니다. 작위적...이라고 마음 아래의
의식이 메아리 집니다. 이제 현실에서는 아무도 그렇게 놀라
지 않으니까 광고나 드라마 그리고 영화에서 촬영용 표정을
관리합니다. 아마 시간이 더 흐르면 교과서에, 예전에 이런
식으로 놀랐단다... 하고 예제가 나올지도 모르고, 표정관리
학원 같은 것이 성업을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까뮈의 이방인
에서 주연을 맡은 뫼르소처럼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슬픈 표
정으로 눈물을 흘리지 않은 원인에 따라, 간단한 결과적으로
사형을 받을 지도 모르는 일이므로! 예습의 중요성을 아는
나는, 공부가 제일 지겨웠어요! 라고 속으로만 읊조리는 나
는, 나도 모르게 입을 조금 벌리고 눈을 크고 동그랗게 만들
어 보다가 앞자리 여인과 딱! 소리가 나게 불꽃이 튀는 시선
이 마주쳐 버렸습니다. 제기랄 여러모로 엉망이군요.
멈칫 멈칫 흔들거리는 도로를 가까스로 달래며 서식지의 문을
여니 장방형 공간의 우측 모서리에 예상대로 놓인 책상에 쪼
그만 식물이라고 느껴지는 Dark Green Copper의 시무룩한 물
체가 놓여져 있었습니다. 누가 여기 밥먹다 시금치같은 것,
또는 김치 조각을 흘려 두었나? 그럴 리가 없는 데 그렇게 무
뢰한 사람이 이곳에 있을리가 없는데... 해서 책상에 앉으며
자세히 보았기 때문에 발견한 것은 말라 들어 가는 풀잎이었
습니다. 이게 뭐지? 떠오르는 머리속의 구상을 이리저리 끄적
이고 죽은 파리의 날개도 붙어 있는, 고독한 남자의 말라가는
심장을 펼쳐 북어포처럼 만들어 낸 누런 갱지 위에 연필로 쓴
글씨...
행운의 네잎크로바...
행운이 있기를...
이범석...
하아 우리 잘생긴 이범석 대장의 선물이로군요. 지난번 지나
가는 말로 네잎클로버를 찾으러 간다고 하였고 그리곤 이내
잊어 버리고 있었는데... 어느새 일용할 행운을 찾아서 책상
에 두고 갔군요... 건장한 청년이 초원의 풀밭위에 앉아서 자
신의 애인과 또 좋아 하는 형님을 주기 위하여 네잎클로버를
뒤적이는 모습... 마음속의 캔버스에다가 정밀하게 한번 그려
봅니다. 아마 흐린날 오후 바람은 그의 그을린 어깨와 모양
좋은 턱 아래를 지났을 것이고, 제법 멀리서도 눈에 띄는 그
의 Mandarian Orange 빛 셔츠가 Medium Sea Green의 초원 위
에서 한참을 그렇게 꼬물꼬물 아지랑이 처럼 머물러 있었겠지
요...
아마도 오래전 역시 젊은 내가 강원도의 어느 초원에 있었던
기억이고 그리고 네잎 클로버를 찾아 초원에 머울렀던 기억입
니다. 행운이 왔는지 아닌지는 아스라한 기억속의 일일 뿐입
니다. 그러나 나는 그당시 누군가를 위하여 네잎 클로버를 찾
고 있었고 그것은 아주 행복한 기억이었습니다. 해서 사랑은
주는 것이 더욱 행복하다고 하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상
대가 시원시원하게 잘 받아 준다는 보장만 있다면, 적어도 피
끓어 생존하는 시간의 안쪽에 뚜렷한 수납인이 존재 한다
면... 이렇게 마음 써주는 일로 하여 나는 이미 행운을 듬뿍
받은 고마움을 느낍니다. 그리고 나는 누구에게 이렇게 행운
을 나누어 주려, 마음을 열고 주고 쏟고를 하였는지... 그리
고 지나치게 긴 오랜 가뭄의 끝에 죽죽 갈라지고 까맣게 타서
드디어는 걱정스러운 일면기사가 되어 버린, 신문속의 칼라사
진 같이 비현실적인 논바닥의 형상으로 함께 말라버린 마음은
분명하게 내것이지만, 그렇게 된 것은 내 탓이 아니라... 라
고 변명하는 자신을 돌아보며 더욱 고개를 들기 힘듭니다. 막
걸리 때문이라고는 차마 못하겠군요.
잠시후 삐걱이며 문이 열립니다. 보셨어요? 음... 고마워. 뭘
요... 약간 볼을 붉히며 다시 어디론가 바쁜 걸음을 옮기는
이 대장입니다. 해서 깔끔하고 두터운 하얀 종이위에 곱게 풀
을 먹이고, 클로버 잎을 정성들여 펴서 다시 그 위에 비닐을
붙이고 이대장의 사인이 든 누렇게 들떠가는 갱지까지 오려서
붙여둔 것은 그리고 잠시후 풀이 마르면 수첩에 끼워들고 다
닐 것은 그는 아마도 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내
일이든 모래든 언제인가 달표면 태양전지의 Medium Slate
Blue의 파라솔 아래, 그와 다시 소주잔을 기울이며 이 부드럽
고 말랑말랑한 이야기를 다시 꺼내어 들것입니다. 아마도 열
네배쯤은 더 많이 말랑하고 친근한 미소를 띄우며 조금씩 아
득하게 취하고, 마침내 크릴새우를 양껏 마신 긴수염고래 같
은 뒤뚱거림으로 천천히 하늘로 떠오르고 둥실거리고, 작아진
숲을 내려다 보며 큰곰자리를 지나, 좁고 마른풀의 궁전, 코
끼리의 무덤으로 핏! 하고 사라지고 말겠지요.
잠깐 고개를 들어 내다본 하늘은 Dark Slate Grey로 무겁게
내려 앉아 있었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숲의 저편엔 생명과
약동이 존재하고, 가난한 미소를 지닌 여행자의 가슴엔 따스
하게 건넨 생명으로 번뜩이는 빛이 있고, 창 밖엔 뻐꾸기가
고즈녁하게 숲의 이곳 저곳을 만지작 거리는 노래가 제법 멀
리까지 퍼집니다.
내게 일용할 행운! 세그루의 소나무 아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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