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 시간부터는 나와 아이들이 부담없이 자유를 만끽하는 때입니다.
아이들과 함께 동심으로 돌아가 자연스럽게 떠들며 재잘거릴 수 있어 좋고, 굳이 저녁의 찬거리 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며 늦도록 불을 켜 두어도 탓하는 이 없으니 말입니다.
날마다 오는 그 손님은 오늘 건너 내일 그것도 정오 쯤이나 되어야 오거든요. 여느 때의 숙직 같으면 일찍 오지만 오늘은 주경야독의 첫발을 내딛는 입학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때는 `바로 이때야` 라는 생각이 번쩍 드는군요. 날마다 오는 그 손님에 대한 이력의 대자보를 꾸밀 생각입니다.
그리고 풋풋한 봄내음에 실어서 큰 호흡으로 날려보낼까 싶어 조심스레 주위를 기웃거려 봅니다.
그 손님은 불혹에 이르는 남매의 자상하고도 때론 엄한 아버지이기도 하지만 한살 아래인 저에겐 늘 쿠사리를 해야만 하는게 취미일 정도로 못 마땅하게 군답니다.
무엇이 그리도 마음에 들지 않는지.....
오늘은 불만스러운 게 아마 없을꺼야 라며 이것 저것 치우고 정리 정돈을 해 두어도 또 무언가를 찾아냅니다.
이런게 신랑 시집살이라던가요?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상실하고 있을 뿐 아니라 줄줄도 모르는 그런 멋없는 손님이지요.
칭찬에는 어지간히도 인색하면서 꺼리가 생겼다하면 가부장적인 기질을 발휘하는 봉건주의자, 지나친 결벽증으로 아내를 피곤하게 할 다분한 성격의 소유자이지요.
어머님이 지어준 사냥개 코라는 별명도 가지고 있고요. 때론 내무장관도 겸임하는 샤프한 그 손님도 출근때는 늘 저를 향해 손을 들어 `잘 다녀 오리다`는 손짓을 하고 출발하는 모습이란 저를 영화속의 주인공으로 만들어 놓기도 합니다.
겉으로는 보기에는 마치 잉꼬 부부같은 모습이 드러나 보이니 제 속이 더 타지요.
아내에 대한 규제를 제외한다면 하기야 단점보다 장점이 수두룩하지요.
손재주가 뛰어나 가정에 쓰이는 기구들이나 생활에 불편한 점을 모두 해결 해주는 근면하고 검소함을 빼놓을 수가 없답니다.
도배도 손수하여 재료비 배의 절감효과를 얻기도 하고 앵글과 합판으로침대를 만들어 매트를 올려놓으니 50만원 짜리 침대가 하나도 부럽
지 않더군요.
거기에다 제가 만든 침대 커버를 씌우니 이거야말로 금상첨화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방마다 쌓여지는 너저분한 책을 시골에 옮겨두기를 여러번 하다가 자꾸만 불어 나는 책 관리를 골똘히 생각하며 제도를 하더니 자리도 덜 차지하고 책을 얼마든지 꽂을 수 있는 아담하고 예쁜 두개의 책장을 만들어 냈습니다.
아침 5시 반이면 영락없이 일어나 단 5분도 낭비하지 않는 그 손님의 업적은 계속 이어집니다.
그 동안 모아두었던 수없이 많은 상장과 표창장을 비롯해 가족별로 성장 과정과 중요한 이력을 노트에 기록해 둔 것은 우리 집의 가보이자 오래도록 빛날 보석이기도 하지요.
또한 손님은 인생의 발자취란 것을 기록하여 지난날을 회상하기도 합니다.
족보 책을 뒤적여 나는 누구인가를 발췌하여 5학년, 4학년인 남매에게 교육의 자료로 뿌리를 찾는 아버지이기도 하지요.
결혼 후 경조사에 쓰여지는 부조금도 일일이 기록하여 잊지 않고 챙기는 것과 갑자기 몸에 이상이 생기거나 아플 때 이용할 수 있도록 자기 진단법 등도 기록하여 정리하고 있습니다.
무엇이든 필요한 것이라면 꼭 서류철을 하여 보기 쉽도록 엮어 놓지요.
평소 기록과 정리를 생활화하는 습관은 가족에게 무언의 가르침으로
스며 들고 있습니다.
이렇듯 말보다는 행동으로 실천하며 가정과 직장을 윤택한 삶으로 가꾸려고 노력하는 그 손님에게는 문제가 없는 것 같은데.....
아무래도 여러 가지로 부족한 내게 문제가 많이 있는가 봅니다.
하지만 어려운 것도 아닌 평범한 너그러움을 바라는 것도 팔불출 아내의 과분한 욕심일런지요?
오늘은 건강 검진을 하고 왔습니다.
유방암 자궁암 심전도 위내시경 시력검사 청력검사등등...
말로만 듣던 위내시경까지도 엉겹결에 하게 되었습니다.
혼이 났지만 아무튼 기분이 좋군요.
배가 고픈줄도 모르고 시내에 들러 잘 보이는 국어사전 한권과
다른책 한권을 사서 들어 왔는데 오래전에 써 두었던 위의 글이
보였습니다.
읽고 나니 피식 웃음이 나더군요.
`나`라는 자존심은 깡그리 버리고 사는데도 참 힘이 들었습니다.
세월이 정말 약이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