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살
어둠이 날카롭게 좌우로 조금 찢어지고, 곧이어 예리한 칼날
에 잘리운 것 처럼 주욱 늘어나며 틈을 벌리는 순간, 알 수
없는 곳에서 갑자기 깨어난 새가 되었습니다. 발 아래 움켜
잡은 것은 고압선이었고, 하늘을 깔끔하게 베어버린 전기줄
의 끝, 먼곳에선 이미 보랏빛으로 노을이 지고 있었고, 나는
어디론가 날아 올라야 했습니다. 초조한 마음과는 반대로 그
러나 어디로 가야 하는지, 나와 비슷한 색깔과 부리와, 날개
를 가진 새의 종족은 어디로 가 버린 것 인지 알 수 없었습
니다. 나는 바람이 이는 것을 느꼈고, 움찔 움찔 균형을 잡
고 있었습니다. 목적은 무엇이지? 나는 왜 새가 되었을까?
들녁은 비어 있었고, 까마득한 아래의 땅은 바삭한 마른 내
음을 풍기며 부글거리고 있었습니다. 어디선가 날카로운 소
리가 울렸고, 나는 마침내 날아 올랐습니다. 아니 날아 올랐
다고 느낀 한순간 나는 가라앉고 있었습니다. 뜨겁게 달구어
진 대지에서 날아 오르려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려 안갖힘을
써도 배가 닿을 듯 말듯한 그 안타까운 간격은 좀체로 멀어
지지가 않았습니다. 나는 죽음이 가까운 곳에서 팔짱을 낀채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는 것을 느끼고 있었고, 뜨거운 증기
보일러가 쉿!쉿! 내며 임계 압력에 다다라는 듯한 위험을 저
릿저릿하게 느끼고 있었습니다.
때로 갑자기 나타나곤 하는 아주 오래된 기억처럼 문득 한기
를 느낍니다. 근육의 여기저기가 파리를 쫏으려는 말의 피부
처럼 제멋대로 이리저리 부들거리며 떨립니다. 어 이런 한기
를 느껴 본 것이 얼마만이지? 아마도 지난 주내내 하루 4~5
시간만 잠을 잔데다가, 매일 연속되는 음주 때문에 지나친
건강을 삼간 것이 조금 더 지나 쳤나봅니다. 약간 묘한 기분
이로군. 그래 이럴때는 더욱 가열차게 마셔 주어야해... 해
서 소주를 반병쯤 더 섭취하였을 때 갑자기 어질한 현기증이
느껴 졌습니다. 먼 곳 잔디가 깔린 듯 파릇한 벼가 튼실히
자라는 논들은 15도 정도로 기울어져 조금 위태롭게 보였습
니다. 잔을 놓고 내 몸에 대하여 잠시 집중하였습니다. 그저
스처 지나는 가벼운 한기나, 몸살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미약
한 증세들이 가끔 다가오곤 하였지만 열에 들떠 천정이 우그
러들며 빙빙돌고 낮아지고 급격하게 솟구치며 높아지는 경험
은 먼 대학 1년 때의 겨울 이후엔 마주친적이 없었습니다.
쑤시다라는 표현은 정말 적절하지 못한 것 같았습니다. 피부
와 근육사이에 뭔가 뻐근하게 만드는 이물질이 끼어 드는 듯
한 느낌. 고교시절 젖산이라는 피로물질이 근육에 고이게 되
면 피곤함을 느끼게 된다고 배운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아마
지금 나의 근육 사이사이에는 차갑고 맑은, 서리와 물방울이
뽀얗게 매달려 있는 유리잔의 투명한 물에 하얀 가루약을 풀
었을 때나, 바카디에 칼루아를 부으면 마치 뇌와 같이 엉기
며 작은 구름의 형상을 이루듯이, 독성물질이 뭉게뭉게 번져
가고 있나 봅니다. 등이든 어깨든 손으로 건드리는 곳마다
모두 불에 덴 듯 아픕니다. 의자에 앉아 있는 엉덩이에도 아
픔이 동반된 묘한 쾌감 같은 것이 등줄기를 따라 머리속으로
날카롭게 내 닫습니다. 아마 지금 내 몸을 송곳으로 찌르면
새카만 피나 아니면 독성물질 가득한 칙칙한 회색의 고통이
흘러 나올지도 모릅니다. 그간 너무나 진한 회색의 물속에서
부유하였으므로 나는 뼛속까지 회색으로 물들어 버린, 배를
옆으로 15도쯤 기울인 채, 한쪽방향으로 헤엄치는 물고기가
되어 가고 있는 지도 모르지요.
땅속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것 같은 가래 끓는 소리를 들으
면서 새로 담배에 불을 붙였습니다. 연기가 천천히 주변의
시야를 가리우는 동안 나는 나의 몸에게 조금 미안 하였습니
다. 차가운 물에 샤워를 하고, 상당한 담배연기를 흡수 시키
고, 매일 저녁 흐느적 거리게 될정도로 알코올에 적셔 놓곤
하는, 그래서 아침이면 땀에 젖은 침대에 일어나 잠시 멍하
게 앉아 새로운 고독으로 귀에 이명이 울릴때까지 동작을 정
지 시켜 놓는 나의 몸에게 많이 미안 하였습니다. 어딘가에
적당한 약이 있을까? 나는 약이 필요한 것 같아. 막걸리에
타서 마시면 또 다른 맛일 꺼야.
잔을 놓고 마음으로 그려둔, 다음 발자국이 삐뚤어진 축으로
움직이는 자이로스코프 처럼 비척거리면서, 매번 15 Cm정도
씩 목표와는 다른 곳으로 옮겨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너무
빠르거나 너무 느리게 다가오는 나의 한발자욱 다음의 행선
지를 보면서, 마치 인생을 닮았군! 하고 중얼 거린 기억입니
다. 지치고 늙은 패잔병처럼 발을 끌며 걷는 것이 조금 더
안전한 일이라는 것을 이내 깨닫곤, 영원한 거리의 냉장고에
서 막걸리를 꺼내었습니다. 그리고 감기, 몸살, 기침, 콧물
에 좋다는, 아니 내 몸에 좋다는 것인지 감기, 몸살, 기침,
콧물에게 유효한 것이라는지, 조금 아리송하게 쓰인 노란 약
봉지를 집었습니다. 패독산... 뭔지 모르게 중국 무협지에
나오는 독약과 같은 마시면 온몸이 파랗게 변하면서 즉시 썩
어 들어갈 것 같이 무시무시한 이름이로군... 그렇게 혼자
천천히 읊조리면서 차가운 쌍화탕에 버무려 마셨습니다. 아
무래도 혼자 사는 남자가 아프다는 것은, 그리 권장 할만한
일이 못되는 것 같았습니다. 어쨋든 하얀 시트가 깔린, 그리
고 장미꽃이 꽂힌 크레졸 냄새 가득한 병원에서 몇몇 지인들
에게 둘러싸인 영화의 한 장면 같은 그런 말캉거리는 뽀얀
상황이 아니라면 몸살이라는 것은 다소 귀찮기만 한 어떤 것
임에 틀림이 없으니까요.
언젠가, 굉장한 열과 여름날 해변의 말라가는 해파리가 될
정도로 땀을 내고 나면 몸속의 노폐물이 모두 빠지고, 그때
신체 내부의 여러 가지 균들이 모두 이상 고온으로 죽어 버
려서 상당한 명현현상이 온다는 보고서를 읽은 적이 있습니
다. 해서 고열로 아프고난 뒤에 사람의 눈동자는 광체가 휘
황할 정도로 빛나고, 머리는 회전이 아주 빨라진다고 그러더
군요. 그러니까 고열에 들뜬 상태를 겪고난 뒤에는 심정적으
로, 육체적으로 재 정비된 깔끔한 상태가 된다는 것이지요.
정말 그렇다고만 한다면, 지나치게 괴롭지만 않다면, 그리고
때로 아직도 감기로 많은 사람들이 죽는다는 어느 리포트의
수치만, 그리 거슬리지 않는다면, 가끔은 고열의 헛소리도
절대로 피해갈 것만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몸 속의 잡균이
모두 죽고, 조금 현명해 진다지 않습니까?
눈감은 어둠으로 유배된 공간에서 뜨거워 지고, 펄펄 끓어오
르고, 어질거리던 대지는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았고, 주변
엔 여러 가지 현란한 색의 작은 고리 또는 다각형의 색종이
같은 것들이 무수히 지나고 있었습니다. 나는 지하 깊숙한
곳에서 울리는 물방울 소리 같은 것을 들었고, 귀에 울리고,
먹먹하도록 시끄러워 지는 소리에 눈을 떳습니다. 이마와 머
리카락이 자라는 곳의 경계쯤에서 땀방울이 귀 옆으로 주르
륵 흘러내렸습니다. 이마에 얼음 수건을 올려두며 차가움으
로 핑크빛에 가깝게 변해가던 가늘고 긴 손가락이 자고 있는
머리위를 떠돕니다.
당신 굉장한 소리를 내더군요. 두텁게 강을 덮은 얼음이 갈
라지는 소리요. 많이 힘들어요? 열이 심해요. 얼굴도 하얗게
되었구요. 이마가 이렇게 뜨겁다니... 많이 뜨거워? 응...
그럼 냄비에 물담아 와봐. 왜요? 간호하느라고 힘드니까, 이
마에 냄비 올려두고 라면이라도 끓여 먹지. 하나도 재미 없
어요... 그래? 나 좀 잡아줄래? 이 침대 자꾸만 어디론가 가
라 앉고 있는 것 같아... 잣죽을 끓였어요. 이 세상에 태어
나 처음 만들어본 잣죽이구요. 엄마가 하던 것을 흉내낸 것
이예요. 누군가를 위해 잣죽을 끓인다는 것은 생각보다 많이
마음 무거운 일이었어요. 기운내서 얼른 일어나요. 나는 당
신이 이렇게 쉽게 쓰러질 줄은 상상도 못했어요.
상상도 못 했어요.
상상도 못 했어요.
상상도 못 했어요...
그렇게 당신의 음성은 협재 굴속의 속삭임과 동일한 음색으
로 메아리 지고 있었고, 나는 그말을 곰씹고 있었습니다. 당
신은 나를 책망하고 있는 것인가요? 어떠한 일이 있어도, 몸
살 따위에 쉽게 쓰러지는 사내가 아니길 바란다는 일종의 경
고 였나요? 쓰러지지 않다는 전제가 우선된 한정된 상태의
나 이기를 바란다는 가이드라인을 제시 한 것인가요? 영원히
라는 말에 건강한 이라는 단서가 붙은 듯한 것을 이제야 느
끼고 말쑥하게 빼입은 자괴감을 다시 면접합니다.
그렇게 제법 오랫동안 치유기간이 요구되는 성공과 실패라
는, 이별과 고독이라는 인생의 몸살 때문에 나는 당신이라는
절대적이고 영원한 모유 분비 대상으로부터 영원히 유기되
고, 방치되고 마침내 폐기되고 있나 봅니다. 그리하여 오늘
아침 이렇게 행성은 정확하게 90도씩 찍찍! 소리를 내며 베
트남전 흑백 필름의 실감나는 기록 영화에서 본 헬리콥터의
주 로터처럼 핏핏! 돌아가고, 나는 우물속에서 혼자 끙끙거
리며 몸과 그리고 그리움의 고통으로부터 뜨겁고 긴 늪지의
길을 어깨에 지고 걷고 있었습니다.
부글거리며 끓고 있는 세 그루 소나무 아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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