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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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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머무는 산


BY 쟈스민 2002-10-30

오랜만의 산행이라서일까 간밤에 잠을 설치기라도 했는지
괜스레 눈이 뻐근하고 그랬다.

어제오늘 갑자기 차가워진 바람을 막아볼 요량으로
주홍빛 티셔츠위로 살짝 조끼한장 걸쳐 입고 카라를 살짝 세워주니
그런대로 멋스럽다.

카키색 후드점퍼를 입고, 폭신한 양말 신은 발로 등산화를 신어보니
이제 떠나기만 하면 될듯 싶어 흐믓한 웃음을 차창가로 날린다.

창밖으로 펼쳐진 풍경은 조금은 쓸쓸해 보이나
멀리 보이는 산허리에 물들고 있을 단풍을 그려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20년동안 봄가을로 떠난 여행...

이제는 너무도 익숙하여 오랜지기처럼 되어버린 동료들 ...
낮익은 얼굴들이 푸근하고 마냥 좋다.

30여명 남짓한 과원들과 함께 하는 산행은
늘 다람쥐처럼 산을 오르는 선두주자들을 따라
우리 여자들은 오늘도 조금씩 뒤쳐지는 걸음을 재촉하는 가운데
가쁜 숨을 고르면서도 경치구경하느라 거북이 걸음이다.

쉬엄쉬엄 가던 차에 만난 사람들
두손을 꼭 잡고 벌개진 얼굴로 산을 오르는 두 부부...
10여미터에 한번씩 쉬어 가시는 할아버님 ...

옷깃에 슥슥 문질러 나누어 먹던 사과한알, 귤 한쪽의 인심으로
모두는 우리가 된다.

복 받으세요... 하며 인사하는 사람들의 넉넉한 표정에서 가을이 익어간다.

곳곳에 아름다운 자태로 서 있는 단풍나무들이 하도 예뻐서 가던길을 잠시 멈추는 시간들
어디메쯤 왔을까 뒤돌아 내려다 본 풍경이 너무 곱다.

아... 상쾌하다.
이 맛에 산에 오나보다.

앞으로는 더 자주 오고 싶어져 ...
왜 그런지 20대에 바라보던 그 산이 아닌것만 같아 ...

숲을 향해 나는 아마도 그런 말을 속삭였던 것 같다.

오늘이 지나고 나면 뻐근해진 다리를 어찌할 줄 몰라 할것이면서도
지금 이 순간 난 누구보다도 행복한 사람이 된다.

늘상 마주 보는 얼굴인데도 유난히 정겹고, 살갑게 다가서는 그들과
소탈한 웃음 웃어보는 그런 시간은
내 인생에 있어서 그 어떤 것보다도 소중한 보석같은 것이리라.

끝이 보이지 않을 것처럼 가파른 산길을 오르면서
인내가 무엇일까 인생의 여정이 이런 것일까
어설픈 감상에 젖어 눈을 들어 보니 파아란 하늘이 바로 저기에 걸렸다.

정상에서 일행을 만나니 자리 깔고 반가이 우리를 맞아준다.

누군가가 짊어지고 그곳까지 왔을 돼지고기 수육은 채 따뜻함이 가시지 않아서인지
매콤한 배추김치 이파리에 싸서 동동주 한잔과 먹으니 그 맛이 가히 꿀맛이다.

모두가 한 가족처럼 서로를 챙겨주니 너무도 흐믓하다.

정다운 얼굴들과 사진 한장 찰깍 찍고 내려오는 길
조금씩 다리가 후들거리는 것 같다.

이파리가 다 떨어진 앙상한 나뭇가지에 걸린 감나무는 왜 그리도 이쁜지 ...

가지끝에 매달린 감을 보면서
성급하게 눈내린 상상을 하니 한폭의 동양화가 그려 진다.

후드득 날리는 바람에 흩날리는 노랗고, 빨간 단풍잎새 몇을 주워 담는다.
아이들의 책갈피에 끼워 주어야지...

유난히도 빛고운 단풍나무앞에서 멋드러진 폼으로 사진을 찍어 둔다.

걸어도 걸어도 내려오는 길은 길기만 하다.

가까스로 도착한 식당은 사람들의 열기로 후끈하다.

이름도 모르는 산나물로 차려낸 밥상은 상다리가 휠듯 푸짐하다.

동료들의 얼굴엔 홍시빛 취기가 번진다.

병아리 눈물만큼 받아 마신 술로 아짐들도 얼굴이 발그스레 하니
참으로 여유롭고 즐거운 날이다.

가을산은
어머니의 품처럼 넉넉함으로 우리를 맞고 있었다.

고향에라도 온듯 스치는 그리움으로 내 마음도 가을을 하나가득 안아 본다.

산자락에 어둠이 내리고
돌아오는 차안에선 들썩이는 사람들의 어깨춤으로 마냥 흥겨웁다.

오늘은 그 어떤날보다도 긴 하루, 가득차 보이는 하루로 보낸다.

나도 멀래 흐믓한 웃음을 입가에 머금으며 가을산과 작별을 한다.

다시 돌아간 일상에도 가을산의 기운을 불어 넣고 싶다.

하루 하루를 곱게 채색해 가고 싶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