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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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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언장 (1)


BY 통통감자 2000-11-24

당신과 살아온지도 햇수로 4년이 되었군요.
한번도 이렇게 불러보지 못했습니다.
여보!

항상 철없는 막내동생 같은 절 오빠처럼, 때론 아빠처럼 보살펴주고 사랑해주었던 당신께 정말 면목이 없습니다.
이렇게 내 마지막을 정리하면서 하필 미안하다는 말부터 꺼내야 하는지...

정말 당신께 미안합니다.

제대로 된 밥 한그릇 만들어 드리지 못했습니다.
어설픈 밥상을 애써 비우며 행여 제가 화를 낼까봐 간도 맞지 않는 국을 후루룩 비워주는 당신께 감사드립니다.
제 손맛은 뒷전이고, 매번 당신께 밥상머리 잔소리를 얼마나 해댔는지 저도 알고 있지요.
발도 누울데를 보고 뻣는다고, 당신이 재잘거리는 투정을 다 받아주리라 믿었답니다.

정말 당신께 미안합니다.

오늘도 자는 저를 깨우지 않으려고 까치발을 딛고 다녔을 당신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픕니다.
싱크대에 가지런히 놓아진 빵접시와 우유잔을 보면서 또 다시 당신 걱정이 앞서는군요.
미리미리 당신 건강을 챙겼어야 했는데,...
제가 없으면 그 나마 어설픈 밥상조차 못받을까 걱정이 됩니다.
슬퍼하더라도 굶지는 마십시요.
제가 있는동안도 변변히 먹질 못했는데, 저로인해 슬퍼서 식사를 거르면 더더욱 가슴이 아플것 같습니다.

여보!
당신은 아시나요?
제가 얼마나 당신을 사랑하는지..

평생 고생한번 안하고 큰 것 처럼 설거지하는 손을 보고도 미안해하고, 옷장문을 열고도 미안해하고, 기침 한 번 쿨럭여도 미안해하는 당신.

저 당신만나 손이 거칠어졌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관리 못한 제 탓이지요.
정장을 사지 않는 이유는 돈도 돈이지만, 불편하고 어울리지 않아서 입니다.
물론, 회사일에 집안일에 제 나름대로 열심히는 살아왔지만 그렇다고 건강을 해칠만큼의 노동은 아니예요.

항상 미안하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물론, 당신을 만나서 잃은 것도 많습니다.
처녀적 몸매도 잃었고, 혼자서 넉넉했던 경제적 여유도 잃었습니다.
하지만 당신을 만나 얻은 것이 더 많았습니다.
사랑하는 가족을 얻었고, 마음의 평화를 얻었고, 같이 느끼는 행복을 얻었습니다.

더 이상 미안하다 생각지 마십시요.

제 물건은 모두 당신 마음대로 처분하십시요.
버려도 상관없고, 누구를 주어도 상관없고, 가지고 계셔도 상관없습니다.
다만, 제가 아끼는 피아노만은 우리 형주에게 남겨주셨으면 합니다.
형주는 쇼팽의 녹턴을 좋아합니다.
태교때부터 제가 직접 들려주어서 인것 같습니다.
가끔 형주가 그 피아노를 만지며 엄마를 기억해주길 바랍니다.
제 수첩속에 있는 처녀적 사진을 형주에게 주고 싶군요.
아직 어려서 엄마의 얼굴을 잘 기억할 수 없을것 같아서, 이왕이면 예쁜 엄마로 남고 싶습니다.
울지 않으려고 했는데, 자꾸 눈물이 나옵니다.

소중한 당신!
매일매일을 공기처럼 느끼며 살아왔습니다.
늘 필요한 존재였음에도 불구하고, 미쳐 고마움을 못느끼며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지금 제 인생을 정리하며 당신이 내게 얼마나 필요한 존재인가 가슴으로 절규하듯 외치게 합니다.

여보!
당신 곁에 오래 머물고 싶습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은 분명 좋은 아빠일 것입니다.
제 몫의 사랑까지 형주에게 주십시요.

이 글을 당신이 언제 읽게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올해가 될지, 내년이 될지, 아니면 수십년 후가 될지...
하지만 2000년 오늘 저는 제 생을 이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끝으로 제 부모님께서 아직 생존해 계신다면 너무나 사랑했다고, 너무나 감사하다고, 그리고 죄송하다고 전해주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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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의 마지막주 금요일은 너무나 유언장을 쓰기에 적절한 시기인것 같습니다.
미쳐 지나쳐버리기 쉬운 일상의 느낌을 해마다 정리하는 마음으로 적어보려 합니다.
제가 몇 해를 쓰게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이제 삼십대 초반에 유언장이란 단어를 생소하게 써보았습니다만, 내일은 빵 대신 밥으로 남편을 출근시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금의 심정으로는....
긴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