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버작가

이슈토론
법인카드로 친언니 카페에서 매일 2만 원씩 점심값 결제한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배너_03
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조회 : 271

◈50년대 소녀


BY RUSA 2002-10-19

벌써 40년도 넘게 흐른 세월...
누나가 없는 나는 외사촌 누나를 좋아했지요.

서울서 기차타고 버스타고 배타고 하여 이틀을 꼬박 달려 섬도 아닌 남도 끝자락 한 켠에 묻어둔 먼 외가로 갈 때면 나는 누나를 볼 생각에 가슴을 두근거렸지요.
주인이 없어도 무어라 표현이 불가능한 그 방의 냄새가 좋았고, 호롱불 켜 놓은 밑에서 중학교 다니던 외사촌 누나의 손때 묻은 그 방의 모든 소품들이 신비롭고 마술같았지요..
지금사 보면 세월 지나 유치한 단어들의 나열일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그때의 침묻혀 연필로 쓴 글씨 하나하나는 바로 움직이는 생물이었지요.
글 행간 사이사이에는 왜 그리 그리움과 동경과 슬픔들을 많이도 묻어 두었는지...
선생님을 사모하여 슬프고
가난한 삶이 부족하여 아프고,
도시로 나갈 꿈이 안타까와...
한의 세월이 묻어있던 그 일기장을 몰래 훔쳐보는 내 눈에 비친 세계는 내가 아는 어떤 세상보다 신비로왔지요.
그런 세계가 있다는 게 마치 우주 유영을 하는 것처럼 온통 새롭고 몽롱하기만 했지요.
내가 누나를 더 좋아했던 이유는 누나였기 때문이 아니라 나는 감히 상상도 못하는 그런 세계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더 집착을 했던 것 같았지요.

그때만 하여도 멀리 떨어진 중학교에 다닐 수 있는 여학생은 동네에 한둘에 불과할 정도로 여자들의 교육은 생각도 못할 시절이었지요.
그래 누나 친구들이 그 방에 모여 얘기를 할 때면 기껏 산자락 하나 넘어 시골 중학교의 학교 생활을 그렇도록 재미있게 얘기했지요.
동네 여자들은 전부 거기에 귀 귀울여 어떤 선생님은 습관은 어떻고 어떤 선생님의 말은 어떻고 하는 시시콜콜한 것을 마치 자기네가 그 학교에 다니는 양 맞장구를 치곤했지요.
그 방에 모여 했던 내가 들은 그런 얘기들은 바로 동화였고 신비로운 그림이었지요.
나는 귀를 쫑긋 세우고 그들의 얘기 하나하나에 침을 꼴깍꼴깍 넘기며 들으려 애썼지요.
방학이 끝날 때 쯤 배를 타러 부두로 내려 올 때는 나를 가슴에 꼭 안아 주는 그 품에서 나는 냄새가 그리 좋을 수가 없었지요.
새벽 밥 먹고 일찍 떠나는 아침 배를 타고 아직 안개 걷히지 않은 그 골짝 마을을 보고 손을 흔들면 가슴 한 켠에 ‘쿠르릉‘하며 허물어지는 성벽이 나를 제대로 서있게 만들지 못했던 일이 지금 꿈같습니다.

철들어 덤덤하여 집안 대소사에 가끔 얼굴 마주 보다가, 사는 게 바빠 근 20여 년 만에 누나를 만날 일이 있었지요.
먼데 지방 도시에 사는 터라 마음만 있지 가 볼일이 특별히 없었던 터라. 왕래가 자주 있을 일이 없었지요.
사는 형편은 그래 넉넉하더라마는 사실 나는 누나의 얼굴에서 어릴 때 느끼던 애잔함이나 꿈을 기대했었는지도 모르지요.
그런데 누나는 손주 본다고 힘들고, 유학시킨 아이들 골치 섞인 얘기며, 가지고 있는 건물의 집세를 잘 받지 못하여 속 썩인 얘기들만 했지요.
얼굴에는 가는 주름들이 제대로 자리 잡아 관록있는 할머니가 되어서 이제 남은 건 어릴 때 내가 보던 세계는 아무데도 찾을 수 없었지요.
나는 어릴 때 보던 그 신비한 방을 떠올리며 누나와 연결지으려 해도 도대체 이어지지 않는 겁니다.
그날 나는 나의 신비로왔던 옛날을 도둑맞았지요.
그날 나는 우울했지요.
나의 아름다웠던 객선(배.)에서 바라본 외가 동네의 아름다운 그림과 그 뱃고동 소리까지 잊지 않으려 해도 도대체 찾아지지를 않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