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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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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 斷想


BY 고들빼기 2001-06-19

일요일을 맞아 모처럼 남편과 함께 고향집을 찾았다.
정확하게 말하면 남편의 고향집이다. 이미 고향집에는 아무도 살지 않는다.
그러니 우리를 맞는 사람이 있을리 없다.
대신 집앞 텃밭에서 분뇨 냄새가 우리를 맞았다.
우리 밭을 부치는 이웃 아저씨가 거름으로 분뇨를 밭에 뿌려 놓은 것이다.
도시에서는 쉽게 맡을수 없는 냄새다.
농촌에서도 분뇨를 거름으로 쓰는 경우가 없기에 모처럼 맡아보는 냄새다.
고약한 냄새지만 그 냄새는 거부감만 주는 것이 아니다.
그 냄새를 따라 아득하게 느껴지던 추억이 봄날 아지랑이처럼 피어 올랐다.
신혼초, 내 심신의 안식처는 그 고약한 냄새의 근원지인 통시(변소)였다.
우리집 통시는 삽짝밖에 있었다.
시댁이 어렵던 신혼 초기에는 삽짝 밖의 그 통시가 내게 큰 위안을 주는 아늑한 별채였다.
지금은 생각만 해도 웃음이 나지만.....
거적으로 엉성하게 둘러처져 있는 앞 모서리 부분에는 밖이 훤히 보였다.
앉으면 그 틈새 사이로 높은 창공을 바라볼수가 있어 그래도 좋았다.
저 높은 곳에서 자유롭게 떠 가는 구름 한점을 한없이 부러워하며 눈물짓던 때도 있었다.
5月의 싱그러운 햇살을 받으며 희망에 찬 초록의 팡파르가 울려 퍼져도 아무런 감흥을 느낄수 없었다.
내 생활의 리듬은 소리없이 사그라들고 생경스런 의식만이 내 가슴을 조여왔다.
남편의 직장을 따라 시댁과 동일 군인 구미로 분가를 했는데 신혼생활은 온통 혼자 시골에서 외롭고 허무하게 보내야만 했다.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토요일만 되면 시댁으로 가야 하고 지엄한 남편의 명령(?)으로 혼자 10리 길을 걸어가다 보면 내 자신이 한없이 서글프고 처량해 짐을 느낀다.
때가 되면 기다림으로 소일하시는 노쇠한 시부모님의 기대를 저버릴수 없어 남편이 시키는 대로 하는 수밖에 없었다.
미혼시절 누구나 한번쯤은 이상적인 결혼 생활을 꿈꾸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냐만은 그래도 이렇게 고달픈 결혼 생활은 아니었는데 하는 생각이 내 속으로 자꾸만 비집고 들어 왔다.
그래도 행여 부모님의 눈밖에 날까봐 조신하며 나의 애살스런 몸가짐을 부던히도 움직이며 놀려댔다.
부두막이 낮은 재래식 부엌에다 불을 때야만 하는 불편과 번거움이란 이루 다 말할수가 있으랴.
제사때나 명절을 보내기 위해서는 허리의 골절을 펴 주는 동작을 겨우겨우라도 해주지 않으면 굽어진 골절은 아주 굳어 버릴것만 같았다.
농촌의 한낮은 왜 그리도 길던지 달콤한 오수도 마음놓고 제대로 즐길수 없는데 왠 잠은 그렇게도 쏟아질까.
바쁜 일철이 되면 요일과 상관없이 혼자 시골에서 지내야 했다.
연장과 사람은 많을수록 좋다는 농촌의 순수한 진리를 애써 외면 할수가 없는 현실을 직시 할수밖에 없었다.
"나"라는 존재는 훌훌 벗어서 아궁이에 밀어넣고 부지갱이로 쑤셔대며 태우고 또 태워야만 했다.
그래도 다분히 남아있는 현실에 대한 원망으로 지쳐 있을때 삽짝밖의 유일한 그 통시는 내겐 큰 위안 이었던 것이다.
어설픈 시설 따윈 아무런 문제가 아니었다.
그 고약한 냄새도 향기(?)로 느껴진지가 언제 였는지 모른다.
때론 그 향기를 수면제 삼아 몽롱해 오는 의식을 잠시나마 잠재울수 있는 나만의 무한 자유공간 이기도 했다.
식구중 누가 찾거나 불러도 그곳에 있는한 악따받게 구는 호기를 마음껏 부릴수 있는 곳도 그 통시 안에서는 가능했으니까.
내겐 처음부터 그곳이 익숙하지 않았지만 변비도 아닌데 볼일을 빨리 못보던 나는 다리가 저려 오래 있기가 여간 불편한게 아니었다.
냄새는 왜 또 그리 고약하던지 손가락으로 코를 잡고 그 냄새를 맡지 않으려고 갖은 애를 쓰기도 했다.
"젊므이 어디 있노?"
"예" "통시에 있는데요!"
그 곳에 있다는 확인만 되면 내 의지대로 움직이면 되는 것이다.
굳이 당신의 손발이 되어 드릴수 없는 상황이 되어 있는 곳이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