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회 : 322

아름답게 늙어가는 방법 87


BY 녹차향기 2001-06-19

아!!!
실로 오랜만에 눈물로 맞이하는 친정엄마를 보는 것처럼
반가운 빗소리를 들었어요.
타는 갈증을 모조리 채워줘야겠다는 심정이 되었는지 젖가슴을
풀어헤지고 그렇게 온 대지와 먼지로 풀썩이는 산하를 달래주고 있는
저 빗물이 어찌 반갑지 않을 수가 있을까요?
따로 농사일에 전념하는 친척도 없지만, 거북이 등처럼 갈라져 있는 사진을 신문에서 텔레비젼에서 보면서 애타지 않는 사람 누가 있었을까요?

흠뻑 젖셔주고 가라지요.
시름에 겨워 울고 있던 농부의 가슴도 재워주고,
목마름에 눈을 깜박이는 모든 풀들, 이름없는 꽃들에게까지,
그렇게 흠뻑 단비를 오래토록 내려주고 가라지요.
이왕지사 메마른 가슴 재워줄 것이면
세상 일로 지치고 외로운 사람들 가슴도 촉촉히 적셔주고 가라지요.
힘들고 지친 마음이걸랑 저 빗소리에 함께 날려버리면서
하염없이 한 번 걸어보라지요.
비에 흠뻑 젖은 채로.

세상에 존재하고 있음을 실감할 때,
그때가 바로 시련에 빠졌을 때와 같음은 너무나 쓸쓸한 사실이겠지요?
으음.... 그래, 이렇게 힘들다는 것은 내가 존재하고 있다는 뜻일게야 하며 스스로 위로하신 하루였나요?
빗소리와 함께 어떤 하루를 지내셨나요?
즐거울 수 있었다면 천만다행.
만약 힘들었다면 그것은 우리가 살아가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니 또한 다행.

어렸을 적엔 너무나 작고 사소한 것에조차도 기쁨을 느낄 수 있었잖아요.
소풍가는 날 아침,
떡국을 먹을 때,
모처럼 얻어입은 새 옷,
새로 사 온 공책, 몇자루의 연필,
나뭇잎 사이로 스치는 맑은 햇살과
풀잎에 달린 영롱한 이슬,
운동장에 펄럭이는 만국기,
줄이 맞춰져 있는 교실의 책상,
선생님의 유쾌한 웃음소리,
아무도 몰래 넣은 둔 작은 동전 몇 개,
친구의 전화,
누군가로부터 듣는 격려의 말,
백점을 받은 시험지,
참새들의 지저귐,
라일락 향기,
좋아하는 노래를 우연히 들을 때....

이젠 그런 사소한 것에서 행복을 느끼지 않은 지가 무척 오래되었지만, 아니 그런 시절에서부터 이젠 너무나 멀리 비켜나 있지만
그런 나날들이 내게 있었음은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인생엔 몇가지 비밀이 있기 마련이겠지요.
그런 비밀들을 하나씩 알아나가면서 어른이 되고, 아이들을 키울 수 있고, 흰머리를 가질 수 있는 권리도 생기겠지요.
사소한 일에 분노하지 않기,
사람으로부터 실망하지 않기,
타인에게 기대하지 않기,
남은 날이 많기를 바라지 않기,
제 명대로 무사하게 사는 것을 바라지 않기,
그저 옆에 어느 누가 있는 것을 감사하기,
일용할 수 있는 양식이 내게 조금이나마 있음을 다행으로 여기기,
속상한 맘을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
하찮은 음식을 나눠줄 이웃,
밤이 무섭고 외롭지 않을 남편 혹은 아내,
비로소 내가 작고 보잘 것 없는 인간이었음을 알게 해 주는
아이들.............


참으로 끝없이 힘들 것 같은 일들을 어느새 마치고 나서 느낄 수 있는 상쾌함을 죽음에서 느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럴까요?
아름답게 늙을 수 있다는 것이 자신으로부터 자유로워 질 수 있는 것과 연관이 있을까요?
집착하지 않고, 미련갖지 않고, 사소한 것으로부터 번뇌하지 않고
살 수 있다면 우리의 인생은 다른 모습을 할 수 있을 것이라 믿어요.

빗소리에 종일 귀 기울이며 비와 함께 바빠졌을 농부들의 손을 생각했어요.
참 정직하고 바른 손, 거칠지만 부끄럽지 않고 당당한 농부들의 손이 있었기에 우리가 살 수 있었겠지요.
여러분은 오늘 어떤 소리에 맘을 쓰셨나요?
빗소리라면 다행이겠지만, 행여 어떤 사소한 소리가 님들의 마음을 흔들어놓지는 않았는지요?
평범한 듯 하지만, 매일 다르게 펼쳐지는 일상.
노여워하거나 슬퍼마세요.
그런 일들은 바로 우리가 존재하고 있음을 알려주는 신호이니깐요.

어떤 일이든 다 헤쳐갈 수 있으리라 믿어요.
그런 소리들로부터 자유롭게 날아오를 수 있는 날들도 곧 오겠지요.
수고하셨어요.
피곤한 몸을 이젠 좀 쉬세요.
길게 아주 편하게 누워서 단잠을 청하세요.
쭉쭉 스트레칭을 하면서 세포 구석구석에 있는 힘겨움을 털어버리세요.
낼 아침엔 맑은 기운이 님께 새로운 힘을 북돋워주리라 믿어요.

모두 평안한 밤 되세요.
안녕히 주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