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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미운 남편-벌초하던 날


BY dansaem 2002-09-14

벌초 하러 간다는 신랑이
"같이 갈래?"하고 묻는다.
무슨 소풍이나 가는 것처럼.

나도 별 생각없이 "그럴까?" 했다.
은이는 어머님께 잠시 맡기고.

근데 막상 가 보니 장난이 아니다.
산 밑에서부터 올라 갈 일이 까마득하다.
잔뜩 우거진 풀숲을 헤치고 가야하니.....

남편은 아예 예초기를 짊어지고 길을 만들면서 앞장을 선다.
나는 따라나선 해담이 손을 잡고
술잔과 잔대, 포와 막걸리,
그리고 벌초를 마치고 고구마를 캐기로 했기에
호미 따위를 챙긴 보따리를 메고 멀찌기 뒤를 따른다.
가까이 가면 고속회전하는 예초기 날에 맞고
멀리까지 날아오는 나무조각 같은 것들이 위험하다.

겨우 산소에 올라가니
세상에나......
돌보는 이 없이 버려진 산소 같다.
멋대로 자란 이름도 모를 풀들이
해담이 키보다 높다.
남편은 선 자리에서부터 베어눕히고
나는 뒤를 따르며 갈퀴로 긁어낸다.

우선 대충 베어낸 다음에
다시 깔끔하게 다듬었다.
시조모님과 아버님 산소가 같이 있는데
그 터가 만만찮게 넓다보니
거의 세시간 정도 걸린 거 같다.
그나마 위쪽으로는 베어낸 풀들을 다 치우지도 못했다.

산소 주위로는 우선 깨끗이 치우고
술잔을 올렸다.
할머님, 아버님 산소에 차례로 잔을 올리고 절을 한 다음
북어포를 안주 삼아 둘이서 음복을 한다.
서너잔이 돌고 나니 술이 오른다.

다음 장소로 이동.

이번에는 고구마밭이다.
남편은 나머지 장비를 차에 싣고 산 뒤쪽으로 돌아오기로 하고
나는 해담이와 산소 뒤쪽 고구마밭으로 향했다.
그런데...

이 길이 여름내 막혀버린 것이다.
차도 다니던 길이었는데
아카시아 나무와 호박덩굴이 우거져
도저히 헤쳐나갈 수가 없다.
할 수 없이 길 옆 호박밭을 밟으며 갈 수 밖에 없었다.
호박도 덩굴이 우거지고
키는 해담이 가슴에 닿으니
그냥 무턱대고 밟고 가는 수 밖에.

고구마 몇 포기를 캐고
뽑아낸 포기에서 고구마 줄기를 딴다.
올해는 고구마가 영 들지를 않았다.
한 포기에 한 개 정도 밖에 들지 않았으니
어쩐 일인지 모르겠다.
남편 말로는 비가 와서 덩굴이 너무 좋아
영양이 줄기로만 가고 열매를 맺지 못한 것 같다고 한다.

피곤하기도 하고 술기운도 돌고 해서
저녁은, 식은 밥 있으니 라면으로 대충 때우자 했더니
기어이 밥을 먹어야겠다고 한다.
오자마자 보일러 급탕부터 눌러놓고
쌀을 씻어 안치고 장조림을 안쳐놓고
아이들을 씻겼다.
해담이를 씻기면서
"한결아! 밥솥에 불을 젤~로 약하게 낮추고 와라."
한결이를 다 씻겨 들여보내면서
"가스렌지 두 군데 불을 다 끄고 보일러도 꺼.

애들 셋을 씻기고 나도 대충 씻고는 들어와
얼른 된장찌게를 끓이고
장조림에 송이버섯 몇개를 다듬어 넣고 한소끔 끓인다.
나머지 있는 반찬에 상을 차려 저녁을 먹고는
남편이 일어서면서 말한다.

"잘 먹었어. 고구마 쪄!"

나는 아직 설겆이도 해야하고
애들 양치도 시켜야하고
걷어놓은 빨래도 접어야 하고
방방마다 걸레질도 해야하는데.....
저 당당함이란!
아니, 저 뻔뻔함이란!

아내라는 이름, 엄마라는 이름에 부여되는
책임과 의무라는 것들에 대해 솟아오르는 짜증을 참으며
혼자서 궁시렁궁시렁 설겆이를 한다.

"내가 결혼을 한 건지, 하녀로 들어온 건지...
파출부는 월급이라도 받지."
하는 생각을 하다가

"여보! 나, 원피스랑 앞치마랑 모자 사 줘."
(외국 영화나 만화영화 보면 하녀들이 이렇게 입고 나오잖아.)
남편은 컴퓨터모니터에 눈을 박은 채 대답을 한다.

"응."

핏!!
꼬인 심사를 꽈배기처럼 풀어보일 작정이었는데
할말을 잃어 잠시 후 다시 얘기를 꺼내본다.

"여보, 나 원피스랑 앞치마랑 모자 사 줘."
"응"

역시 돌아보지도 않는다.
"참나..... 왜 사달라는 지 알기나 해?"
"아니!"

관심도 없다.
어쩌면 알아 듣고는 일부러 딴청을 부리는 지도 모를 일이다.
어이가 없어 쳐다보고 있었더니
남편이 돌아보며 툭 던지는 말.

"왜 또 신랑을 그런 존경스런 눈으로 쳐다 봐?"

"내가 원래 신랑을 존경하지."
"근데 왜 입이 삐이 돌아가?"
"돌아가긴 뭘 돌아가? 존경한다는데..."
"입은 삐뚤어져도 말은 바로 한다, 뭐 그런 거야?"


그렇게 또 하루가 간다.
얄밉다가도 한번 픽 웃고 넘어가는 하루하루.
다들 그렇게 살겠지.

에구~~~~~
내일은 또 웃을 값이라도
오늘은 얄미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