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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약의 달콤함과 씁쓸함에 대하여


BY 1004bluesky1 2001-06-06

알약의 달콤함과 씁쓸함에 대하여

어느 날 갑자기 들이닥친 그녀로부터의 메일
그건 의외의 충격이었다.
한 회사 동료이고 세 살 연하에 결혼 3년 된 유부남.
그저 동생이려니 했는데.
무엇보다 알 수 없는 건 그들은 아무문제가 없는 잉꼬부부라는 것.
그녀 역시 그것이 가장 알 수 없는 부분.
아무 문제없이 산 것이 바로 문제인 것 같다는 괴변.
결혼하고도 다른 사람을 좋아할 수 있다는 것 자체를 믿지 않았던
그녀였기에 놀라움은 더 했다.
하지만 그녀를 흔든 건 바로 첫사랑이 주었던 그 잊을 수 없는 떨림.
잊고 있었던 그 낯선 느낌과 함께 찾아온 옛사랑의 기억.
그리고 기다림. 환희. 가슴앓이
꼬리를 물고 찾아드는 불륜이란 단어의 추적에
결국 보고싶다는 말 한마디조차 안으로 삭이게 만들며 겉돌 수밖에 없는 일상적인 대화들.
그래도 즐거웠겠지. 살아있다는 느낌.
아직도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고 사랑을 할 수 있는 뜨거움이 남아있다는 희열
바로 그런 흔들림으로 사랑을 맞이하는 게 아닐까?
뒤를 따르는 번뇌의 늪과 좌절의 안개를 헤치고 나가야 하는 시련을 감수하고라도

어릴 적 어머니 몰래 분홍색의 예쁜 알약을 훔쳐먹은 적이 있다.
원래 약을 좋아하기도 했지만 그 약은 내겐 약이라기보다는
달콤한 초콜릿 같이만 느껴졌었다.
몰래 디딤돌을 놓고 올라가 위태위태하게 꺼내온
그 분홍 알약을 손에 넣었을 때의 그 환희.
조심스레 입에 넣고 마루 이에 앉아 발을 흔들던 내게
달싹지끈한 황홀함을 주었던 그 첫맛

그렇게 5분이 흘렀을까?
달콤함의 정체를 채 파악하기도 전에
그 달콤함은 쓰디쓴 독약의 본색을 드러냈고
난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배신감에 치를 떨며 뱉아냈었다.
몸에 좋은 약은 입에 쓰다고 했던가?
세상에서 처음으로 맛 본 달콤함과 씁쓸함이 교차되는 알약.
세월이 흐른 후 알게 된 진리.
알약은 빨아먹는 게 아니라 쓴맛이 나기 전에 꿀꺽 삼켜버려야 한다는 것.
아님 아예 뱉아버리든지.

그래서 첫사랑은 달콤함을 지나 씁쓸함으로 가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실패로 끝나는 경우가 많은 걸까?
시간의 흐름은 사람을 커다란 알약 대 여섯 개쯤은
한꺼번에 삼켜버릴 수도 있게 만들어버린다.
물론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간혹 있지만

아픔의 횟수만큼 갖가지로 맛보게 되는 늘어나는 알약들

알약 하나, 사랑 하나, 알약 둘. 사랑 둘......

갑자기 쓴웃음이 났다.
결국 사랑도 면역이 되는 건가?
맛본 알약의 종류만큼. 갯수만큼.

결국 메일을 주고받지 말자는 말을 끝으로 그와의 사이를 정리하려고 했던
그녀가 해결책을 물어왔다.
다시 메일이 오는데 어쩌면 좋으냐고.
수취거부를 해버리면 되지 안느냐는 내 말에 그런 것도 있었냐며
자기는 그냥 받기는 하고 보지는 않으려고 했다고 말하며 다시 의견을 물었다.

네 맘대로 하라는 나의 대답에 참으로 의외의 대답이 나왔다.

"그래. 우리 아빠한테 물어봐야지.
한 직장에서 메일을 보내고 프린트까지 해서 보는 나의 행동에
의아함을 나타낸 것도 우리 아빠였고,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면 난 아무 생각 없이 계속 그랬을 텐데.
그래, 역시 난 우리 아빠가 아니면 아무 것도 안돼.
난 모든 게 아빠 손바닥 안이라니까."
"내가 어떻게 이렇게 멋있는 우리 아빠를 놔두고
저런 보잘 것 없는 사람에게 끌렸는지 모르겠단 말이야."

정말 철이 없는 건지 아님 부부 사이에 그렇게 허물이 없는 건지.
난 더 이상 할 말을 잃었다.
부럽기도 하고 심술이 나기도 하고

"근데, 아빠처럼 늘 챙겨주는 사람도 때로는 말이야.
챙겨주다가 지쳐서 자신이 비비고 싶은 언덕이 그리울 때가 있단다.
배우자의 그 철없음이 짐으로 느껴져서
자신도 그 짐을 누구에겐가 하소연하고 싶은 그런 소망."

진심이긴 했지만 말을 해놓고는 후회를 했다.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가지고 괜히 그런 말을 해서 불안함을 부추긴 것 같아서 말이다.

하지만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그녀는 자신의 흔들림을 남편에게 들키는 우를 범하지 않았고,
그런 미묘한 문제를 남편에게 상의 할 수 있는 대화가 열려있으니.
때론 모르는 게 더 약이 되는 일도 있으니
문득 나쁜 짓인 줄 알면서도 누가 말리면 더 하는 아이들처럼,
그러고도 부모님만은 다 용서해주실 거라는 기대로
다시 응석을 부려대는 큰 아이를 보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