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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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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루 따서 술 담그며.


BY 雪里 2002-08-30

며칠동안 최소한의 동선 거리를 움직이며
살아 보니까 답답함이 턱까지 차 오른다.

"나, 시골 갔다가 세시까지 오면 안되요?"

"가서 또 풀 뽑고 병 나려구 그러지?"

"아니, 비오면 머루 다 떨어 질까봐.
많이 익었을텐데, 태풍 온다잖아요!"

"그럼 그거만 하고 오는거다!"

"알았어요, 나도 이젠 못해요."

며칠만에 내 머리를 날려 주는 바람은
한결 시원해 진것 같고
길옆의 녹색 논은 어느새 이삭을 한뼘도 더 피워내고 있었다.

며칠전 밤낚시를 갔을때
강가에 지천으로 피어서
밤을 활짝 밝히던 달맞이꽃들이
오늘은 길옆에
먼지를 흠뻑 뒤집어쓰고 맥없이 서서
입을 다문채로 나를 본다.

아들이 어설픈 솜씨로 기계질 하다만 풀밭이
처녀적 옆집 살던 할머니가 가위질 해놓은
손주아이 까까머리를 생각나게 하더니
내게 엄청히도 잘하시던 할머니 모습을 그립게 한다.

만수위를 채우고도
동그란 구멍으로 넘쳐나는 물소리가 싱그럽다.

그이랑 나랑 이름붙인
일미터쯤도 모자르는 미니폭포는
수량(水量)을 줄인채로
여전히 돌을 쓰다듬으며 내려 흐른다.

그늘 덮힌 커다란 돌을 골라
다리를 매달고 앉아보니 방금 지나간
햇볕의 흔적으로 온돌방 같다.

며칠에 한번 들르는 주인인데도
반가워 죽겠다고 이쪽 저쪽으로 뛰면서 좋아하는
다롱이를 끌어 안고는 털을 뒤적여 본다.
벼룩 죽으라고 에프킬라를 흠뻑 뿌려주고 갔었는데...

프라스틱 소쿠리를 들고 가위를 들고
밀집모자를 챙겨쓰고...
모습만보면 거창한 일을 해낼 일꾼같다.

반은 알로 따며 먹고,
반은 가위로 송이째 잘라 담고.

쪼그려 앉은키가 불편해서 몇번이나 허리를 펴니
작은 소쿠리 하나 가득 머루가 담겼다.

씻어 건진 머루를 알알이 따니
작은 알들이 너무 예쁘다.

한참만에 왔다며 반기는 앞집 화가아저씨는
먹을 사람 없는 집에서 술은 왜 담냐며
구실삼아 안으로 드신다.

오랫만에 커피 한잔을 나누며
멀리 뵈는 산끝에서
성급히도 가을을 들먹이다가
임자 모르는 술 담는 설명을 한다.

담그면서 즐겁구,
우러나는 빛깔 보면서 즐거울거구,
먹을 사람 생기면 따르면서 즐거울거예요.
주는 즐거움요!

"세시 반이야!"

전화기 속에서 별 급할일도 없는 그이가
독촉을 해 댄다.

"알았어요,갈께요,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