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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기와 유관순


BY 뜰에비친햇살 2002-08-12

★태극기와 유관순(柳寬順, 1904-1920)▶▶▶퍼온글...

조선일보에서 태극기하면 제일 먼저 떠오른 인물이 누굴까하고
설문조사를 한 적이 있었는데 이때 많은 응답자들이 유관순이라고 대답했다.

1919년 삼일독립만세운동 때 상징 인물이자 태극기 때문에 희생된 인물이 유관순이다.
충청남도 천안 출신. 아버지는 중권(重權)이며, 어머니는 이씨이다.
1916년 기독교 감리교 공주교구의 미국인 여자 선교사의 도움으로
이화학당(梨花學堂)의 교비생으로 입학하고,
1919년 3. 1운동이 일어나자 이 학교 고등과 1년생으로 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

그뒤 일제가 이화학당을 휴교시키자 고향으로 돌아와
교회와 청신(靑新)학교를 찾아다니며 서울에서의 독립 시위운동 상황을 설명하고,
이곳에서도 만세시위운동을 전개할 것을 권유하였다.
조인원. 김구응 등의 마을 지도자를 규합하여
연기, 청주, 진천 등지의 교회와 유림계를 규합,
이해 음력 3월 1일(4월 2일) 아오내 장날을 기하여 만세시위를 전개할 것을 추진하였다.
이 날 3,000여 군중에게 태극기를 나누어 주며
독립만세를 선창하며 격렬한 독립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 시위 전개에서 잔인한 일본헌병의 총칼로 아버지와 어머니가 피살당하고
자신은 아오내 만세시위 주동자로 잡혀
일제의 무자비한 고문을 받았으나 끝내 굴하지 않았다.

공주 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언도받았으나 이에 불복,
항소하여 경성[서울] 복심 법원에서 재판을 받을 때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일제의 한국 침략을 규탄, 항의하고,
일제 법률에 의하여 일제법관에게 재판받음이 부당함을 역설하며
일본 검사에게 걸상을 던져 법정모욕죄까지 가산되어 징역 7년형을 언도받았다.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 중에도 틈만 있으면 독립만세를 고창하였고,
그때마다 형무관에게 끌려가 모진 악형을 받았다.
불굴의 투혼으로 계속 옥중항쟁을 전개하다가
1920년 17세의 나이로 끝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하였다.

유관순이 참살된 지 이틀 뒤에 이 소식을 들은 이화학당 교장 푸라이와 월터 선생은
형무소 당국에 유관순의 시체 인도를 요구하였으나 일제는 이를 거부하였다.
유관순 학살을 국제여론에 호소하겠다고 위협하고 강력하게 항의하자
일제는 할 수 없이 시체를 인도하였다.
시체를 인수한 이들이 석유상자 속에 든 유관순의 시체를 열어보니
토막으로 참살된 비참한 모습이었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글정리 송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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