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버작가

이슈토론
A씨에게 남학생 방을 쓰지 못한다고 한 학교의 방침이 차별행위라고 생각하시나요?
배너_03
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조회 : 448

결혼10년만에 떠나는 가족여행


BY 쟈스민 2002-08-12

월요일부터 시작된 여름휴가는 시작부터 연일 비가 내리고 있었다.

아침에 눈을 뜨기 바쁘게 채비를 하고 달려가야 할 일터가
나를 기다리고 있는 생활이 올해로 20년째 들어선다.

언제 10년이란 세월이 흘렀을까 실감이 나지 않을 정도로
늘 바쁘다 바빠를 입에 달고 살던 그 세월이 새삼 돌아봐진다.

더욱이 남편이 하는 일은 남들이 놀기 좋을 때가 제철인지라
맘놓고 가족여행 한번 못 떠나며 보내온 휴가철마다
나는 왠지 모를 소외감을 느꼈던게 사실이다.

올해도 남편이 바빠서 못 떠날것 같다고 하여 별다른 기대없이 있었는데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아내에게 조금은 미안했던지
아는 분의 주선으로 어렵사리 숙소를 예약하고,
렌트카 예약까지 마쳐두고는 제주도엘 가잔다.

10년전의 신혼여행은 단체여행 비슷한 것이었는데 단체로 이리 저리 이동했던 기억,
그리고 약간의 레크리에이션과 주최측의 계획대로 움직여야 했던
지극히 부자유스러웠던 기억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먼 훗날 꼭 다시 한번 오리라 내심 가슴속에 아쉬움을 내려놓으며 돌아온 신혼여행길
그것이 벌써 십년전이다.

며칠동안 계속해서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그래도 십년만에 처음으로 떠나는 가족여행인데
비록 소박하지만 축복받는 기분으로 떠나고 싶어져서
이리 저리 기상예보를 인터넷으로 찾아보며 출발할 날을 기다렸다.

정말 다행스럽게도 우리가 출발하는 날은
맑은 하늘과 하얀 구름속에 포근하게 떠 있는 축복받은 비행을 할 수가 있었다.

난생처음 엄마 아빠의 손을 잡고서 비행기를 타 보는
아이들의 신기해 하는 눈망울이 하도 예뻐서
나는 하마터면 눈물을 보일뻔 했다.

사는게 무엇인지...
그동안 두 아이 낳아 10살, 8살 되도록 키우면서도
단 하룻밤도 집이 아닌곳에서 자고 온 여행의 기억은 없었다.

그저 앞만 보고 바쁘게 내 달리던 내 인생의 사십을 바라보며 떠난 여행은
나에게 참으로 많은 생각을 가져다 준다.

숙소는 근사한 호텔도 아니고 흔히 말하는 콘도도 아닌 펜션이라는 곳이었는데
별장식으로 지어진 민박이라고 했다.
생각했던 것 보다는 무척이나 깔끔하고 아담하게 꾸며놓은 지은지 얼마 안되는 건물이었다.

그리고 렌트카로 빌린 승용차는 달린 거리가 얼마되지 않는 새차였다.

우리 가족을 위하여 기다리고 있었던 며칠동안의 인연으로 깨끗하게 사용하리라
나는 머무는 동안에도 내 손길 한번 더 주려고 애썼다.

10년전의 신혼여행이 흔히 알려진 관광코스를 도는 여행이었다면
이번 여행은 그저 발길 닿는데로 자유롭게 지도를 보며 떠나는 여행이었다.

2박3일 내내 남편은 내게 한번도 운전을 교대해 달라는 말을 하지 않았으며,
피곤해 보이는 기색도 없이 내심 렌트한 차를 조심조심 운전하는 눈치였다.

그런 그가 한없이 믿음직스러워 운전하는 그의 옆모습을 슬쩍슬쩍 훔쳐본걸 그는 알까?

아내와 아이들을 위하여 이번에는 정말이지 함께 하는 여행을 해 보고 싶다며
이리 저리 수소문하여 길지 않은 여정이지만 떠나볼 수 있었다는 것은
참 두고두고 소중한 추억꺼리가 될것만 같다.

얼굴은 모르지만 인터넷으로 알게 된 분을 만나 함께 여미지 식물원을 꼼꼼히 둘러보고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현무암이라고 하는 기암괴석이
파도와 어우러진 검은색 바위의 정교한 모습에
우리 가족은 일제히 탄성을 질렀다.

날이 어둑어둑해질때까지 바닷가에서 점점 거세어지는 파도에 장난을 치다가
아이의 샌들을 잃어버릴뻔 하고,
남편은 신발 잡으러 가다가 바닷물에 온통 옷을 적시기도 하는 저녁무렵까지
우린 그렇게 행복한 나라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다.

저녁을 먹고 돌아오는 길에 마트에서 알콩달콩 장을 보고는
숙소로 돌아와 아이들을 뽀얗게 씻기고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느라 그날 밤은 왜 그리도 짧게만 느껴지던지...
늘 보던 얼굴이지만 왠지 색다른 느낌이었다고 할까?

이튿날 조금은 부실해 보이지만 내손으로 차린 아침식탁에 가족들이 마주 앉는다.
대전에서부터 갖고 간 된장으로 우리들만의 찌게를 끓여 보며
아이들은 그저 신나서 야단이다.

든든히 아침을 먹고는 제주민속박물관으로 향한다.
어찌나 넓던지 조금은 아픈 다리를 이끌고 빠짐없이 아이들에게 설명을 해주면서
우리 부부는 바쁜 오전을 보낸다.

그리고는 미천굴 일출랜드라는 곳으로 발길을 향한다.

마치 태국 어디쯤에라도 와 있는 듯 이국적인 정취가 물씬 풍겨나는 키큰 나무들 숲사이로 쪼르르 산책을 하는데 동굴이 보인다.

냉장고 속에라도 들어가고 있는 양 시원한 물이 뚝뚝 떨어지는 동굴속은
여름이라는 계절을 잊게 해 준다.
서늘한 기운 탓인지 아이들은 엄마 아빠의 팔로 어깨동무를 해달라 한다.

딸아이의 어깨를 팔로 감싸쥔 채 어두컴컴한 동굴속을 걸어본다.
따뜻한 체온이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를 하나 되게 한다.

동굴에서 나와 보니 야외 정원이 너무도 예쁜 모습으로 우릴 반긴다.
나는 오랜시간 그곳에서 머물고 싶은 편안함을 느꼈기에 시간가는 줄도 몰랐다.

그런데 비가 후두둑 떨어진다.
처마끝에서 비를 피하다 차로 돌아오니 배꼽시계가 출출함을 알린다.

이곳 저곳 옮겨 다니며 구경을 하다 보면
제 시간에 밥을 먹을 만한 마땅한 장소를 찾기가 어려운지라
아침 일찍부터 서둘러 준비해 둔 김밥을 먹기로 한다.

"얘들아! 놀러와서도 김밥 싸주는 엄마 그리 흔하지 않단다. 맛있게들 먹으렴 ..."

나는 애써 공치사를 빠트리지 않았고,
남편은 어느새 남편몫으로 준비해둔 길게 썬 통김밥을
부지런히 입으로 날라댄다.

비 내리는 날은 따뜻한 해물칼국수 국물이 그립기도 하지만,
차 안에서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먹는 김밥이 그리도 맛있을 수가...
우린 또 한번 색다른 경험을 해 본다.

빗줄기가 점점 굵어지고 있었기에 우린 일단은 숙소로 가기로 한다.

따뜻한 물에 식구대로 샤워를 하고 일단은 오늘의 여정을 접어두며
잠깐 동안의 나른한 오수를 즐기기로 입을 모은다.

한 시간 여를 잤을까 ...
간밤에 잠자리가 바뀌어서인지 아님 너무 설레어서인지 통 잠을 이루지 못한
나를 위한 남편의 배려가 아주 잠깐동안이지만 숙면을 취하게 해 주었다.

남편의 선배가 근처에서 통나무 까페를 한다고 했었는데,
우리 가족에게 저녁초대를 했다며 어서 일어나서 함께 가자고 한다.

창밖에는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고, 마음 같아서는 내리 잠이나 자고 싶었지만
초대한 분의 성의도 있고 하니 가야겠다고 마음을 바꾸며 다 늦은 저녁에 화장을 한다.

제주산 흑돼지로 만든 석갈비와 맥주, 그리고 저녁식사와 처음 만나뵙는 인자한 모습 ...
비오는 날의 눅눅함을 가시게 할 만큼 훈훈한 인심이 마음을 따뜻하게 해 주었다.

저녁을 먹고는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의 쏟아지는 폭우를 헤치고 숙소로 돌아왔다.

마지막날에는 신영영화박물관을 돌아보고
해변으로 펼쳐진 아름다운 산책로를 마냥 거닐고 난 뒤 성산일출봉에 들렀다.

저녁 비행기로 갈 예정이니 오늘은 섬 주변 여행을 하는게 좋겠다는 남편의 생각에
나는 잘 모르니 당신이 알아서 하라며 그냥 맡겨둔다.

차를 배에 싣고 우도라는 섬에 간다.

섬의 제일 높은 봉우리인 우도봉엘 올라가니 경치가 그야말로 장관이다.

너무도 아름다운 섬의 모습에 흠뻑 빠져서 바닷가를 끼고 도는 해변도로를 달리다가
아무데서나 내려서 백사장을 거닐어 보기도 한다.

시간이 된다면 하룻밤을 섬에서 묵으며 실컷 바다를 바라보고도 싶었다.

하지만 내일부터는 출근을 해야 하기에 아쉬움을 뒤로 한채 성산포로 오는 배를 타러 갔다.

그런데 어찌된 일일까 ...
밀려든 차량들이 줄줄이 이어져 겹겹이 몇줄로 줄을 서 있는 것이 아닌가.

배를 타고 나가서 공항까지 가는 시간을 계산해 보니 시간이 촉박하다.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리다가 1시간여만에 겨우 배를 탄다.

성산포에 내려 다시 해안도로를 달려 공항으로 향하는데
지도를 보면서 그런데로 잘 달려온 듯 싶었다.

그런데 외곽 도로로 가고 있어야 할 우리는 어느틈에 시내도로로 들어와 있었는지
가는 곳마다 신호등이다.

이정표에는 제주공항은 보이질 않고, 제주항이라는 표시만 보였다.

제주항과 제주공항은 분명 다를 터인데 지나가는 이들에게 물어보니
제주항이라고 씌어진 이정표를 가리키며 그곳이 공항이라고 하는 것 아닌가.

방향이 같은 곳이라면 그곳에도 당연히 제주공항이라는 표기가 있었으면 좋았을 터인데...
겨우 겨우 시간 맞추어 공항에 내린다.

바쁘게 수속을 하고 아이들에게 때늦은 저녁으로 햄버거 하나씩을 사준다.

여행이라는 것은
제 때에 밥을 먹지 못하기도 하고, 바뀐 잠자리로 잠을 설치게도 하지만
어디론가 일상을 벗어나서 떠난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매력적인 설레임인듯 하다.

50여분만에 청주공항에 도착하니 비는 아직도 계속 내린다.

참으로 편리하고 좋은 세상에 사는 것만은 틀림이 없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의 마음은 점점더 편리한 것만 추구하게 되고 메말라 가는면도 없지는 않지만
이렇게 가끔씩은 나를 잊고 떠나 보는 여행에서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소중한 그 무엇을 가슴 가득 안고서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기쁨을 누리는 맛에
사람들은 오늘도 떠나고 있는 것인가보다.

떠나는 사람, 돌아오는 사람들로 북적이는 공항에서도 사람 사는 모습은 여전하다.

며칠동안 엄마, 아빠가 우리 엄마, 아빠가 맞는지 실감이 나질 않아서
엄마, 아빠를 자꾸만 쳐다 보며 만져 보았다는 딸아이의 애교스러운 몇마디 말이
빗줄기를 타고 내 가슴에 조용히 내려 앉는다.

조금만 더 마음을 비우고
가끔씩은 이렇게 우리 가족만의 오븟한 이벤트를 준비한다면
우린 훨씬 더 윤기나는 생활을 만들어 갈 수 있을 것만 같은 예감이
여행중의 쌓인 피로조차 싹 가시게 해준다.

내일이면 다시 나는 나의 자리로 돌아가 열심히 일을 하고,
나의 가족들에게도 예전보다 더욱더 지혜로운 어머니이자, 아내의 자리에 있는
내가 되어야할테지...

나로 인하여 달라지는 우리 가정의 표정에 민감하게 대처할줄 하는 여자로
진정으로 나를 가꿀줄 아는 여자로
나는 다시 태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10년만에 처음으로 떠나는 우리 가족 여행을 소중한 추억으로 남겨두련다.

그리고 이번 여행을 기획하고 힘써준 남편에게도 감사의 마음으로
좀더 사랑을 표현하며 조금쯤은 여우같은 마누라로 살아보아야지...

지난 10년동안 걸어온 결혼생활속의 내 자신을
가만히 돌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