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에 몇 가정이 어울려서 도시락을 싸들고 고사리를 꺾으러 갔었다.
발자국을 뗄 때마다 고사리가 보일 정도로 제주의 산과 들엔 고사리가 많다.
그래서 이 즈음에 차를 타고 가다 보면은 동부 산업도로나 서부산업도
로 주변에 고사리를 꺾기 위해 주차된 차량들을 얼마든지 발견하게 된
다.
4월 초부터 5월 말까지 안개비가 자주 내리는데 제주에서는 그렇게 내
리는 비를 '고사리 장마’라고 부른다.
차를 타고 시내에서 30분만 벗어나면 한라산으로 연결되는 야산들이
있고 그곳에는 어김없이 고사리가 있기 때문에 해마다 한 두 번은 고
사리를 꺾으러 가곤 했었다.
고사리를 따라 가다보면 일행들은 각각 흩어지게 되고 고사리와 자신
만의 숨바꼭질이 시작된다.
다 꺾었다 싶어 뒤돌아보면 고사리가 보란 듯이 손짓하고 서 있는 모
습이란...
고사리를 꺾으면서 난 끊임없이 나 자신과 대화를 하곤한다.
현재의 나와 대화 하다가 미래의 나와도 대화하고 그러다가는 어릴
적 뒷산에서 취나물 뜯던 기억이 떠오르면 또 어린시절의 나와도 만나
게 되고...
생각해 보니 내가 살던 마을 뒷산에는 고사리는 별로 없었지만 취나물
은 참으로 많았던 것 같다.
때때로 나물을 뜯으러 동네 언니들을 따라 산에 올랐다가 새콤한 샹
(싱아)을 꺾어먹고 진달래꽃을 따 먹었었다. 그러다간 산 속에서 길
을 잃고 헤매면서 울먹였던 기억들은 지금도 내 가슴에 아름다운 추억
으로 남아 있다.
그 시절엔 왜 그리도 문둥이에 대한 공포심이 많았던지...
산에 가면 문둥이('융촌백이'라 불렀었다.)가 간을 빼먹는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마을 어린이들 사이에 퍼져 있었기 때문에 행여나 문둥이
를 만나면 어쩌나 싶어 노심초사하며 산을 올랐던 기억들이 지금도 생
생하다.
그 때문이었을까?
난 한때 문둥이에 대해 지나치게 관심이 많아서 문둥이 시인 한하운님
의 수필집을 끼고 다녔고 그분이 쓴 '전라도 길'이라던가 서정주님
‘문둥이’라는 시를 외우고 다닌 적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도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작자미상의 시 한편을 기억하고
있는데 (이 시는 중3때 담임 선생님께서 한 정신병자가 쓴 거라며 읊
어 주셨던 것 같다.)
/파란 하늘이 좋아서 파란 물감을 먹었더니
남들이 나 보고 미쳤다고 그래요.
빨간 노을이 좋아서 빨간 물감을 먹었더니
남들이 나보고 미쳤다고 그래요./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고사리를 꺾다가 갑자기 나타난 낯선 아저씨
를 보고는 놀라 고 새끼 손가락만한 두께의 도마뱀이 지나가는 것을
보고는 또 놀라고 까마귀 울음소리에 놀라고 결국은 내 발자국 소리
에 놀랐다.
정말 이지 산속에서는 뱀이나 까마귀보다도 낯선 남자를 만났을 때 가
장 무서운 것 같다. 어릴적에 그리도 두려웠던 문둥이 만큼이나...
체력의 한계를 느낄 즈음엔 고사리가 사방에 보여도 손에 닿는 것만
꺾고는 "고사리 안녕~"하며 차가 주차된 곳을 향해서 걸음을 재촉했
다.
집에 돌아와 피곤한 몸을 눕히고 눈을 감았는데 눈앞에 온 천지 고사
리가 아른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