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한 무명화가...
박진화 선생님이 스스로를 일컫는 말이다.
처음에 이 말을 들었을 때, 참 재미있는 표현이라고 생각을 하며 아무 생각 없이 웃고 말았지만, 그 웃음이 채 가시기도 전에, 나는 그 말속에 담겨있는 우울함(?)을 동시에 느낄 수가 있었다.
무명화가이지만 유명하고, 유명하지만 무명화가인 박진화 선생님...
그 말속에는 그 분이 화가라는 삶을 살아오면서 지금까지 구겨(?)왔던 인생의 시간과 그 노력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는 것이었다.
나는 그 분과 술잔을 기울이며 이야기를 하다보면, 그분이 갖고 있는 문학적 소양과 그 깊이에 종종 놀라곤 한다.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한 그 분의 가치관과 철학은 나에게도 많은 영향을 끼쳤는데, 그 분이 가지고 계신 삶에 대한, 그리고 그림에 대한 열정과 그 치열함은 나로 하여금 절로 고개를 숙이게끔 만든다.
이러한 분을 가까이 하고 있는 나 자신은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가...
1993년이었던 것으로 기억을 한다.
그러니까 내가 93학번으로 뒤늦게 대학에 들어가서 1학년의 새내기 생활을 막 시작하고 있을 때였다.
어느 날인가 선생님으로부터 한 통의 편지가 날라 왔는데, 그림에 몰두를 하기 위해서 전라남도 장흥에 있는 조그만한 시골분교에서 생활을 하고 계신다는 그러한 내용의 편지였다.
그리고 나는 그해 여름방학이 시작이 되자마자, 입시동기생인 한 친구녀석과 함께 바로 그곳을 찾아갔다.
전라남도 장흥...
오전에 일찍 집을 나와서 서울에 있는 그 친구녀석과 함께 고속버스터미널에서 만나, 광주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그리고 몇 시간만에 도착을 한 광주에서 다시 장흥으로 들어가는 시외버스를 타고 또 한두 시간을 달려갔다.
장흥에 도착을 해보니, 어느새 하루는 점차 기울어져가고 있었고, 우리는 또다시 그곳에서 군내버스를 타고 선생님이 계신 시골분교로 들어가야만 했다.
버스의 시간을 알아보니, 우리가 타야하는 그 버스는 하루에 두세 번을 운행하는데, 다행히도 마지막 한번의 운행이 남아있었다.
그 버스의 출발시간까지 조금 여유가 있어서 우리는 일단 장을 보기로 했다.
왜냐하면 선생님이 계신 그 곳에 들어가면 먹을거리를 살만한 곳이 없을 것 같아서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선생님과 우리는 오래간만에 회포를 풀어야만 했다.
삼겹살 두세 근과 소주를 한 대여섯 병을 사들고 그 버스에 올라탔다.
버스는 이내 움직이기 시작을 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우리가 탄 버스는 군내를 빠져 나와 시골길로 접어들었다.
그런데, 그 시골길이 정말이지, 말 그대로 시골길이었다.
첩첩산중으로 둘러 쌓인 그 산길에 차 한 대 정도 간신히 지나갈 수 있는 그런 시골길이었는데, 당연하게도 그 길은 비포장도로였다.
우리가 보기에는 정말 위태위태할 정도로 우리가 탄 버스는 그 시골길을 마냥 덜커덩거리며 달려갔고, 우리는 이런 깊은 산 속에 버스가 달리고 있다는 사실에 마냥 신기해하며 한편으론 들떠있었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이런 오지(?)에서 홀로 외롭게 그림과 싸우고(?) 계시는 선생님이 새삼 존경스러워 보였다.
그렇게 깊은 산 속을 한 시간쯤 달렸을까?
주위는 어느새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을 했고, 우리가 내린 곳에는 선생님이 환한 얼굴로 마중을 나와 계셨다.
어렸을 때, 외숙모가 나에게 이런 얘기를 해준 적이 있다.
큰아들이 군대에 있을 때, 한번은 면회를 갔다고 한다.
형은 70년대에 군대생활을 했었고, 그가 근무를 한 곳은 강원도 인제에 있는 원통이란 곳이었는데, 그곳의 군기는 너무나도 유명해서 오죽하면 지명도 '원통'이겠느냐, 하는 그런 얘기가 있을 정도였다.
즉, 이곳에서 군대생활을 하는 것이 원통해서 원통이라는 말이다. 거기다가 박정희가 정권을 잡고 있었던 1970년대에 군 생활을 했으니, 그 고생은 미루어 짐작을 하고도 남는 것이다.
외숙모는 아들에게 줄 떡이며, 닭고기며 음식들을 바리바리 싸들고는, 그 해 겨울에 경기도 광주에서 어렵사리 강원도 원통까지 찾아갔다고 한다.
그리고 원통에서 군부대로 들어가는 시골길을 버스가 다니지 않는 바람에, 걸어서 들어가게 되었는데, 외숙모는 그 깊은 산 속의 시골길을 혼자서 걸어 들어가며,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고 또 닦으며 그렇게 두 시간정도를 걸어서 들어갔다고 한다.
이렇게 깊은 산 속에서, 아들이 추운 겨울에 고생을 하며 군 생활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니, 엄마의 마음이 찢어지는 듯 했으리라...
군기가 시퍼렇던 그 시절의 군대생활은 참으로 힘들었을 것이다.
거의 거지꼴이나 다름이 없는 아들의 모습을 보고, 외숙모는 또 한번 가슴이 미어졌다고 한다. 곱아 터진 손으로 음식을 먹는 아들의 모습을 보며 외숙모는 또 눈물을 흘렸고, 두 시간동안 걸어서 들어온 그 시골길을, 아들을 그곳에 남겨둔 채, 혼자서 돌아 나오며 그 길을 걷는 내내 또 다시 울음을 터뜨렸다고 한다.
선생님이 계신 그곳에 도착을 해 보니, 어렸을 때 외숙모가 나에게 들려 준 그 이야기가 불현듯 떠오른다.
아마도 나 역시 선생님이 계신 그 곳이, 이토록 깊은 산 속에 위치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으리라...
초등학교 분교는 말 그대로 시골의 분교였다.
전교생이라고 해 봐야 대여섯 명 정도였고, 교실이라고 해 봐야 두세 개 정도였는데, 선생님은 그곳에서 교실 하나를 빌려 그림을 그리고 계셨고, 거처를 하는 곳은 그 학교에 딸린 작은 방이었다.
우리는 선생님과의 재회(?)를 술로서 축하하기로 했다.
우리가 사온 소주병을 보시더니, 이런 곳에서는 이 술이 더 어울린다고 하시며 방구석에 놓여 있던 막소주 대병짜리를 하나 턱하니 꺼내 놓으신다.
그리고 우리는 그 막소주를 가지고 밤새도록 이야기를 나누며 술을 마셨다.
그리고 우리는 그곳에서 아마도 하룻밤을 더 묵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날 밤도 우리는 밤새도록 선생님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또 술을 마셨다.
다음날은 선생님과 함께 군내로 나왔다.
버스로 달려온 그 시골길을 우리는 아주 느린 걸음으로 천천히 걸어서 나왔다.
뜨거운 태양이 우리를 비추고 있었다...
그리고 눈앞에서는 푸르른 산들이 나타났다가는 사라지고 또 나타났다가는 사라져 갔다.
끝없이 펼쳐진 시골길 옆으로는 맑은 시냇물이 흐르고 있었고, 나무 위에서는 매미들이 힘차게 울어대고 있었다.
우리는 그 길을 아주 느린 걸음으로 그렇게 천천히 걸어서 나왔다...
그해는 1993년 어느 여름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