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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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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처녀의 결혼행진곡


BY queenant 2002-07-16

손바닥만한 오피스텔.

하지만 도피처와 안식처가 필요했던 나에겐

더 없는 곳이었다.

처음 이 곳으로 독립해서 나는 결벽증이라고 할만큼 깔끔을 떨었다.

청소기를 열심히 돌리고 걸레로 빡빡 문질러 대면서도

머리카락이 떨어져 있을까봐 스카치 테이프를 손에 들고 다닐 정도였다.

나만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공간이기에 소중했던 것이다.

아무도 나에게 말을 걸지 않아서 좋았다.


차라리 수녀원이나 절으로 들어갔더라면 할 정도였다.

그저 당분간 침묵의 생활을 하고 싶었다.

전화도 개설하지 않은 채 난 나만의 시간을 즐겼다.

30대 중반의 나이..........

이만한 나이이면 다들 결혼을 해서

남편과 아이들과 지지고 볶고 하면 살텐데.........

나는 아직도 혼자인 것이다.

어디가 모자라서?

난 신체건강 정신건강 아무 이상이 없다.

맞선도 보았고

소개도 받아보았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소개받는 자리에

입고 갔던 옷의 수만 늘었을 뿐이다.

지긋지긋하게 족보확인을 했다.

마치 어떤 녀석하고 짝짓기를 해야

평생 후회하지 않은 생활을 할까? 하는 고민과 같았다.

신물이 났다.

손으로 세었던 맞선 수가 손가락이 모자라기 시작하고

기억력이 쇠퇴해서 생각조차 나지 않았다.

마음에 드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그쪽에서 퇴짜를 났다.


자존심도 상하고 기분나빴다
.
나 좋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드물게.......


하지만 뭐가 급한지 당장이라도 결혼을 해야한다는 통에

가정부 급구라고 외쳐대는 것 같아서 사양을 했다.

밑에서 치고 올라오는 새차에 난 폐차직전 똥차가 되어

애물단지 취급을 받았다.

주위 사람들의 관심은 나를 어떻게 처리를

해야할지 하는 것밖에 없는 것 같았다.


모든 대화의 화제는 한가지였다.

좋은 놈 하나 건져 결혼에 성공하기.

그래서 마침내 난 자유독립선언을 했다.

기뻤다.

나 혼자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것을

당당하게 보여주고 싶었다.

시장도 다녀오고

하루종일 요리책을 들여다보고 나를 위해 요리도 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이 손바닥만한 공간이 썰렁하고 커지기 시작했다.

아무리 물건으로 가구로 화분으로 채워도

채워지지 않았다.

전화기를 꺼내 전화개설신청을 했다.

일부러 옷장에서 옷을 다 끄집어내어 흩어놨다.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나 홀로 막춤과 나이에 걸맞지 않은

테크노댄스도 흉내를 내보았다.

하지만 그것은 발악의 몸부림일뿐이었다.

혼자 떠들고 소리쳐 봤다.

옆에 사는 사람들의 항의도 거세었다.

그래도 채워지지 않았다.

앵무새를 샀다.

하지만 바보같은 녀석은 똑같은 말만 되풀이 했다.

뭐가 잘못되는지 난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난 뭔가를 찾았다.

그게 뭔지는 몰랐다.

그저 필요한 게 분명히 있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내 머리로는 도저히 알 수가 없어서

전화수첩을 뒤지기 시작했다.

낯익은 이름들이 나타나자 웬지 모를 기쁨이 솟아났다.

술 한 잔을 함께 하고 싶은 사람을 찍어

전화를 했다.

아주 오래된 친구녀석이었다.

나와 성향이 비슷한 녀석이라 나의 고민을 해결해줄 것만 같았다.

거울을 쳐다보았다.

눈 밑에 주름이 그어지고 있었다.

지우개로 지워질 수 있는 거라면

열심히 지우고 싶었다.

손가락으로 살짝 펴보았다.

손가락이 얼굴에서 떠나자

도로 선이 그어져 버렸다.

세월은 무언가를 남겨주곤 한다.

결코 반갑지는 않다.

감추고 싶은 마음에 화장을 열심히 했다.


여자의 변신은 무죄라고들 하지 않는가.

동갑내기 친구녀석이 오랜만에 날 쳐다보더니

눈이 커졌다.

한동안 피식 피식 웃기만 하더니

이상한 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내가 다른 사람으로 보인다나?

난 나 일뿐인데.........

녀석은 웬일인지 아무 말 없이 술만 마셔댔다.

난 나의 고민에 대해 열심히 떠들었다.

허탕을 치고 술값만 날리고 돌아왔다.

녀석은 끝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주일 후에 그녀석이 전화를 걸어왔다.

만나자고.

녀석은 내 눈을 쳐다보지 못하고

손가락 마디만 애궂게 딱딱 부러뜨리고 있었다.

그러더니 한다는 소리가

"야, 너 나한테 와라.

너 데려갈 사람 나밖에 없는 것 같다."

어이가 없었다.

뒤통수를 얻어맞는 것 같았다.

너무나도 훤히 나에 대해 알고 있는 녀석이

나보고 평생 같이 바라보고 살자고 하는 것이다.

"니가 갑자기 여자로 보인다."

시력도 나쁘지 않은 녀석이 이제껏 날 남자로 오인하고 있었나보다.

웃기지 말라고 3개월을 버뎠다.

그런데 이상한 감정이 생겼다.

매일같이 결혼하자고 조르는 녀석의 전화를

기다리게 되고

눈을 감으면 그 녀석의 얼굴이 판박이 문신처럼


박혀 있는 것이었다.

고문이었다.

하지만 냉랭하고 크게만 여겨졌던 오피스텔이

온기가 돌기 시작했다.

창가에 놓여진 허브향기에 행복해지고

시계소리의 리듬이 즐거워지기 시작했다.


괜히 거울과 친해지고 싶었다.

내가 찾는 것이 사랑의 파랑새였을까?

친구로밖에 안 보였던 녀석과 나는

이상한 옷을 입고 이상한 포즈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치렁치렁한 레이스가 줄줄이 달려있고

50개도 넘을 것같은 실핀으로 머리를 쓸어 올리고

지휘자같은 옷을 입고 나타난 녀석하고

다정한 포즈를 취해보라는 사진기사의 말에

닭살이 돋을 것만 같았다.

그리고 내일 드디어 이 녀석과 결혼서약을 하게 된다.

너무나 가까이에 있었던 파랑새를

난 너무 오랫동안 헤매며 찾았던 것이다.

하지만 이 순간 결혼이라는 매듭으로 난 행복에 취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