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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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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다는 게 뭐 별건가.


BY jks0711 2002-07-16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동안 낫이라는 연장을 잡아본 뚜렷한 기억은 꼭 한번 있다.
여고1학년 때((1971년) 잠시 시골원예학교 교장사택에서 학교를 다닌 적이 있다. 아니 학교를 다녔다기 보다는 유리온실에서 화훼를 돌보며 그저 휴식을 취하는 정도였다.
남녀가 한 교실에서 함께 생활하였는데 시커먼 피부와 투박한 말씨를 지녔지만 왠지 인간냄새가 물씬 풍기는 아이들과 함께 한 생활은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되었다. 초여름인가 그곳에서 좀 떨어진 남평이라는 곳으로 보리 베기 봉사활동을 나간 적이 있다.
시골에서 자란 적이 없는 나로선 처음 하는 낫질이 신기하기도 하고 재미있어 보이기도 했다. 담임선생님과 친구들은 내가 따라 나서리라는 생각을 전혀하지 못했지만 궂이 함께한다고 나선것이다. 농번기라고 밭에 나가 시커멓게 그을린 친구들과 함께 애들이 하는 대로 따라 왼손으로 보리밑동을 잡고 오른손으로는 온힘을 다해 '딱'하고 내리치면 보리목이 싹둑 잘리는 것이다. 새로운 경험에 참 희열을 느낄 수 있었고 넓은 보리밭에 일한 흔적들이 보여 보릿단이 쌓이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그저 좋았다.

드넓은 평야와 높고 낮게 둘러쳐진 산등성, 평온한 들녘에 이마를 스치는 산들바람, 나의 혼을 빼기에 충분한 상태에서 몇 번은 거뜬히 해 냈건만 신 바람나서 어설프게 서두르는 바람에 그만 낫으로 왼손의 집게 가운데 마디를 '탁'하고 쳐버린 것이다.
순간 붉은 피가 솟구쳐 나오고 고막껍질 벌어지듯 살이 벌어진 것을 주위 친구들이나 선생님께 들킬까봐 눈에 불꽃이 튀고 욱씬욱씬 애리는데도 아프단 말도 못하고 가지고 있던 손수건으로 꽁꽁 동여매고 계속 낫질을 했다.
손가락이 욱신거리고 급기야 하얀 손수건이 모두 붉은 핏빛으로 물들었고 손수건 밖으로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것을 옆에 있던 아이가 보고 놀라 선생님께 일러버렸다.
난 말썽피운 것만 같아 미안하기도 했지만 형언할 수 없는 담임 선생님의 표정을 보고 당황해서 선생님을 오래 쳐다볼 수가 없었다.
곰탱이라고 야단을 하시는 건지 핏기없는 얼굴이 한심하고 골치 아픈 아이라고 싫어하시는 건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때 선생님께선 아무 말 없이 밭둑에서 쑥을 뜯어 낫자루로 꽁꽁 찧어 내 손가락에 두툼하게 붙여 주고 부랴부랴 경운기와 택시 잡아타고 병원엘 갔다. 몇 바늘인지 모르지만 꿰매는 수술을 하였고 지금도 그 흉터가 남아 있다.
그렇지 않아도 핏기 없는 얼굴에 몸까지 가늘었던 도시아이인 난 그 후 며칠을 더 그곳의 학교를 다니다 말고 다시 광주로 오게 되었다.

오랜 시간동안 뵙지는 못했지만 그리고 함께 한 시간이 극히 짧았지만 지금도 큰 체격의 그 선생님의 말없이 웃는 모습만 생각난다. 어렴풋이 기억나는 윤정하 선생님. 그리고 항상 포근함으로 날 감싸준 송금자라는 아이. 잊지 못할 소중한 사람들이다.

그리고 오늘(2002.07.07) 삼십 년이 넘어 두 번째로 낫을 들고 풀베기를 했다.
옛 생각이 나서 그때 친구들과 선생님을 생각하며 자신 있게 낫을 들고나섰지만 잘 할 수 있을지 조금 겁이 나기도 했다.
그 동안 씨만 뿌리고 싹이 올라온 것을 본 후 이식하여주고 2개월 이상 돌보지 못했던 수세미와 호박 넝쿨들이 얼마나 자랐는가 살펴보자 하며 사슴목장 쪽의 철그물 울타리 쪽으로 가서 보니 장마로 인한 비 때문인지 사람 키만큼 자란 풀들이 가관이 아니었다.
'으메 얼마나 답답했을까'하며 낫으로 정신없이 풀들을 이리저리 거두고 베며 수세미와 호박넝쿨들을 보니 '어휴 이제야 살겠네. 주인님 고마워요'하며 웃는 것 같다.
풀 속에 숨겨져 있던 묘목들 돌배나무와 살구나무 그리고 몇 그루의 라일락들이 '이제 우리도 씩씩하게 잘 자랄게요. 다시 한번 땡큐우' 한다.
미안한 마음에 한참을 낫질을 하며 왜 이게 재미있을까를 생각해 본다. 대가를 바라는 노동이라는 생각보다는 낫질을 통한 스트레스 해소를 하고 있다는 착각이 들기도 했다. 마치 산발난 머리고 단정하게 자르고 곱게 빗어 내린 기분도 들었다. 섬칫할 정도로 큰 지렁이도 많았지만 깜찍한 청개구리, 수많은 작은 개미, 공벌레, 쇠뜨기, 질경이, 달개비, 칡넝쿨, 이름 모를 많은 풀들.. 무엇보다 좋은 것은 그곳의 생물들과 대화를 하고 있다는 생각도 떨쳐버릴 수가 없다.
우리집 최선생이 호박 넝쿨을 보며 '어이 호박은 이제 이곳에 심지 말고 윗땅 넓은 곳에 심어야겠구만'한다. 왜냐고 물으니 '호박줄기가 넝쿨로 땅위로만 다니는 줄 알았는데 땅속으로 박히면서 가나봐'하는 것이다.
꽤나 넓은 울타리의 풀들을 거의 다 메고 호박 넝쿨 있는 곳으로 가보니 순간 나도 착각했다. 최선생이 말한 땅속으로 박힌 것은 호박이 아니고 머위 잎이었다. 그만큼 풀이 자라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호박넝쿨을 조심스레 가닥을 잡아 쇠그물 담에 걸쳐놓고 풀을 베고 제쳐보니 봄에 학교의 조천기님의 밭에서 몇 뿌리 캐어 심어놓은 머위대가 제법 자라 수확할 만큼 커져 있었다.
'어머나 어쩜... 돌보지도 않았는데 혼자서 이리도 잘 크니' 혼자서 지껄이며 많은 생각을 했다. 내가 베고 있는 이 풀들은 정말 쓸모없는 것일까? 참 땅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배신도 않고 주인의 뜻을 저버리지도 않는다. 조금은 흙을 담고 싶다는 생각도...

최선생에게 풀 좀 베어 주라 하니 전정가위 들고 나무 주위의 풀들만 싹둑 자르고 맨손으로 뽑아내기도 하더니 수세미 넝쿨위로 던진다. 수세미인지 풀인지 모를 만큼 풀이 자란 것도 있지만 아직도 뭐가 뭔지 구별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난 모종일 때는 구별되지 않았던 것들이 제법 크니 어느 정도 구별이 되어 설명을 해 주었다. '여기 여기는 수세미인데 열매가 열리면 천연염색한다고 정선생이 달라고 했고, 천식에 좋다하니 이선생을 좀 줘야하고, 가을 끝무렵에 땅위에서 십센티 정도 위를 잘라 줄기를 페트병에 꽂아두면 수액이 떨어지는데 그것은 피부미용에 좋다하니 얼마나 좋아' 작년에 수확한 수세미는 탈탈 때려 껍질 벗기고 씨를 빼고 잘 말려 이 집 저 집 나누어주었는데 그게 세제가 필요 없이 잘 닦이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손에 닫는 촉감이 좋아 설거지할 때 기분이 그만이다. 이제 풀도 매주었으니 더욱 씩씩하게 잘 자라 꽃도 피고 열매도 맺으리라. 우후~~~ 랄라~~~.

엄두도 안 나고 심난할 정도로 풀밭인 곳이 제법 제 모습을 드려내니 최선생 민망했던지 '역시 우리 마누라 손이 가야 뭔가 된다니까'하고 부추 킨다. 잘한다잘한다 해서 그저 좋아 10층에서 떨어질 나이도 아닌데...콩콩콩.
제초제 좀 뿌려 주라 하면 '자르고 나면 또 자라고 내년이면 또 자랄건데 뭘'하며 그냥 두라 하면 난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풀베는 일을 마치고 올라와 손발을 씻으니 온통 풀줄기와 잎에 할퀸 자국이 쓰리고 아프다. 두 팔목과 무릎이 온통 벌겋게 달아오르고 내가 봐도 흉하기까지 하다. 긴바지에 긴팔로 덮어야 한다는걸 뻔히 알면서도 고놈의 성질머리 땜시...
집에 돌아와 안쓰럽고 민망했던지 양팔목과 무릎에 연고를 발라주며 내 눈치를 살핀다.
어느 누군 이런 날 석가헌에 미쳤다고 한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런 것도 같다.
미친다는 게 뭐 별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