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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야만적 카타르시스에 관해


BY 쫀득공주 2001-05-17

나는 레슬링을 좋아한다. 아마도 먼 어릴 때부터였던 것 같다. 고래등같은 아저씨들이 까만 빤스 걸치고 네모난 고무줄 속을 누비던, 스펙타클한 터프함... 아니, 곰곰히 생각해 보니 터프함은 아니였던 것 같다. 김일 아저씨의 장엄한 박치기, 천규덕 아저씨의 당수로 소 때려잡기, 그들에겐 그냥 스포츠란 느낌보단 절절한 한편의 드라마같았던 기억이 진하게 묻어있다. 항간엔 모두 쇼라는 얘기도 어린 내 귀에 들려왔지만 김일, 천규덕 아저씨가 일본놈(?)과 맞붙어 피를 철철 흘리며 싸우는 날엔 눈물을 훔쳐가며 열열히 외치곤 했다. "김일 박치기, 박치기! 작열하는 박치기속에 여지없이 나가 떨어지는 일본선수의 꼬라지를 보며 내 가슴속에는 유관순 누나의 태극기가 펄럭이고, 윤봉길 열사의 도시락폭탄이 수없이 터져 나갔다. ~대한 독립 만세~~만세~ 하지만 이 와중에도 견딜 수 없는 궁금함이 있었다. 왜 김일 아저씨는 그 천하무적의 박치기를 갖고 있으면서도 한참을 얻어터진 뒤에야 비틀거리며 그제서야 그 비장의 카드를 써야 했을까? 피 범벅된 얼굴을 감싸며 챔피언 밸트를 허리에 찰때, 관중들은 미친듯이 환호 했지만, 나는 슬펐다. 정말 슬펐다. 짓밟힌 후에야 처절하게 분노하는 우리네 역사를 어린 내가 다 알 수는 없었지만 그 처절함이 나를 슬프게 했다. 그래서 그후로 오랫동안 레슬링 보기를 끊었다. 열기가 많이 사그러들기도 했지만... 허나 요즘 그 병이 다시 도졌다. 매주 화요일마다 꼬박고박 방영되는 모TV의 레슬링 중계를 눈에 불을 켜며 보고있다. 물론 미제 레슬링이긴 하지만. 그러나 전에는 잔혹하게만 느껴졌던 아메리칸 레슬링이 갑자기 무지무지 재밌어졌다. 헐크같은 체구들, 괴이한 복장, 미친듯한 헤어 스타일, 각종 쇼, 쇼, 쇼우~ 사각 고무줄의 반동을 이용한 다이나막한 첨단 기술, 되지게 맞아도 빨딱발딱 일어나 시도하는 반격의 묘기등등.. 머릿속이 스믈 스믈, 심장이 팔닥팔닥 고거참.. 전율의 엑스타시!! 조막만한 아줌마가 새벽 한시가 되도록 소파에 앉아 레슬링 삼매경에 빠졌으니 그 낭군도 기가 찰 노릇이다. 몇차례의 잔소리로 그 팽팽한 고무줄을 끊어보려 하지만 끊어질 리 만무다. 투혼의 게임이 한차례 가슴을 쓸고간 후에 한잔의 냉수를 마시며 나는 생각한다. `나는 왜 형이하학적인 뒷골목의 스포츠에 열광하는가?`. 힙합댄스를 추며 경쾌하고 현란한 기술을 선사하는 경량급 선수에게서 나는 왜 섹시함마저 느끼는가... 결혼 십년만에 나 완전히 변태라도 된 걸까? 싸이의 새처럼... 아니다, 아니다, 그렇지는 않을게다. 내 기억속에 무기력한 나른함으로 잠든 까만 빤스의 드라마를 좀더 새롭게 각색해 보고 싶은 욕망이었을 게다. 더이상 처절하지도 않고, 열나게 얻어맞아 가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치지 않아도 되는 그런 ... 물론 나는 내안의 잔인한 본능은 들키고 싶지않아서 약자일 것같은 선수만을 응원하며 반칙을 일삼는 짐승같은 상대를 되지게 패주길 소망한다. 그리고 빨간 빤스 선수의 긴 다리와 멋지게 벌어진 가슴속에서 캐빈 코스트너의 영웅적 낭만을 잊지 않는다. 참, 생각해 보니 그렇다. 자중해야될 아줌마도 이런 싸이코적 취향에 열광하는데, 십원짜리를 외치며 엽기적 춤을 일삼는 모가수가 어린 아그들의 감성을 후벼파는 건 이미 시대적 세태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좀더 진지하게 연구해 볼 생각이다. 나의 야만적 카타르시스가 결코 십원짜리는 아니라는 것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