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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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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포도가 익어가는 우리 집.....


BY 다움 2000-11-13

첫 작품을 떼어 내며....
재작년 이맘때였다. 작은 아이를 가져 그림을 쉬고 있었는데 진영으로 이사를 가면서 나의 그림에 대한 끊없는 열정을 채울 수 있었다.

복지 회관에 그림을 등록했다. 작은 놈을 데리고 설레임으로 시작한 그림은 멀지 않아 난간에 부닥쳤고 유화하는 언니들의 곱지 않은 시선과 말 없는 은근한 압박들. 조용한 분위기에서 시작해야 할 그림을 작은 아이 때문에 망친다는게 주 이유였다.

아직은 철부지 4살. 끊없는 활동성을 가진 사내아이. 강당이라는 좁은 공간에 가둬두기엔 넘치는 생명력을 어찌 할 수 없었나보다. 징징거리며 보채고, 떼쓰고 편안한 맘으로 그림을 그리기가 너무 힘들었다.

그렇게 몇 개월을 보내고 한 해를 맞이하며 작은 아이를 유치원에 입학시켰다. 그리고 난 여유로운 맘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그들과도 허물 없는 만남이 시작되었다.

선 긋기부터 시작해 아그리파까지 수 없는 연필과의 전쟁들. 첫 붓을 잡았을 때의 황홀한 그 감회와 그림은 자꾸만 쌓여갔고 제 빛을 갖는 것 같았다.

연말엔 복지 회관에서 전시회를 갖게 되었다. 시 차원에서 주민들에게 보여 주기 위함이었다. 홍보도 겸한.

선생님이 그린 수많은 그림들 중에서 맘에 드는 그림을 선정하여 베끼는 작업을 했다. 아직 초보에 가까운 우리들은 그야말로 흉내내는 그림으로 만족해하며 이쁘고, 고급스런 액자에 그림들을 하나 둘 끼우기 시작했다. 액자 덕분인지 아님 날로 향상된 나의 실력탓이었을까?
제법 모양새를 갖춘 그림이 완성되었다.

난 항아리와 청포도를 그렸다. 제일 쉬워 보였고 시간적으로도 도움이 많이 되었다. 애들 때문에 집에 와서 그림을 그린다는 건 엄두 조차 갖지 못한 나에게 고작 복지회관에서의 한정된 공간과 제한된 시간내에서의 그림은 소재가 단순한 그런 그림을 선택하게 만들었나보다.

무려 6번을 그려 완성한 누가 뭐라고 해도 나에게 있어선 애정과 정열을 쏟은 첫 작품인셈이다. 전시회를 끝내고 그 그림은 우리 거실 중앙을 차지하는 보물이 되었다.

김해에 이사를 왔고 놀러오는 사람마다 한 마디씩 던지는 "언제쯤이면 저 포도가 익어 떨어질레나....어지간 하면 그림 바꾸지....포도가 완전 삭았다니깐"

드디어 그림을 떼어냈다. 겨울 냄새 물쒼 풍기는 나뭇가지만 앙상한 나무에 칼 자국으로 눈 쌓인 것도 나타내는 현저한 발전을 한 그런 그림으로 교체했고, 지금도 거실 중앙에 제 위치를 만족하듯 그렇게 폼 잡고 있다.

기분이 아주 흡족해야 하는데 아쉬움이 생기는 건 왜일까? 나의 첫 작품에 대한 남다른 애정에 기인한 탓일까? 아님 일년동안 동고동락한 아직은 버릴 수 없는 나의 자존심?에 기인한 것일까?

난 좀 더 나은 그림을 그려놓으면 나의 알량한 자존심을 세운다고 생각했는데 나의 착오였을까?
그 땐 왜 그렇게도 그 소리가 듣기 싫었는지 난 지금도 겨울 냄새가 물쒼 풍기는 그림을 쳐다본다.
곱지 않은 시선으로, 그 뒤에 감춰진 첫 작품에 대한 애정어린 시선을 뒤로 한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