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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두리 삶의 이야기(27) 씨앗을 넣고....


BY 영광댁 2001-05-05

씨앗을 넣고...

어제 잠깐 내린 비를 등대 삼아 땅이 촉촉해져서
새벽녁 일어나 산밭을 가본다.
돌아서는 내 등에 걸린 한강엔 안개가 잔뜩 내려 앉아
게슴츠레 눈을 뜬 아이랑 닮았다.
어둠이 묻어 있는데 일어나 옷을 입으니
"엄마, 어디가..."
아이들은 엄마가 돌아서기만 해도 달라보이나.
" 너 말 안들으니까 도망갈려고...."
"일기도 다 쓰고 자고 이렇게 일찍 일어났는데 무슨 말을 안들어요...
"도망은 무슨...너를 두고 어디로 도망을 가.밭에 가볼려고, 어제 비왔잖아"
"종자 넣어야지.. 더 자".
이불깃을 잡아당겨 아이 목에 눌러주고 그렇게 돌아선 새벽 밭이다.
산에서 내려와 밭에 앉아 있다가 내 목과 몸을 둘러 가는
바람이 나를 신선으로 만들고 만다,
이 새벽바람은 세상에 있는 고민이란 고민,근심이란 근심 모두 다 잊어버리게 만드는
성분이 있다. 마냥 선선한 바람과 신선함이 호미를 든 손을 멍하게 만들고 바람에 나를
맡겨 그 공기속으로 유영하게 만들고 만다.

배추꽃이 지고 있다. 제일 처음 꽃이 피었던 부분은 씨가 여물어가고...끝은 끝없이 꽃이 피어나지만 어머니가 했던 대로 꼭지부분의 순을 집는다.
이렇게 해두면 더 이상 꽃은 피어오르지 않고,
씨앗은 한꺼번에 익어 여문 씨앗을 받을 수 있다.
키워보진 않았지만 새 종자를 심어본다.
청정채 , 겨자채, 신선초...청정체는 발아율이 높아 잘 자라지만
당도가 높아 관리를 조금만 게을리 하면 벌레들이 축제를 벌리고 만다.
겨자채는 매콤한 맛이 나는데 유채과 비슷하고,
신선초는 당귀잎과 비슷하지만 쓴맛이 나고 신선하다.
쌈으로 싸먹기도 하지만 겉절이를 해먹으면 입맛이 살아나고
알싸한데... 아이들은 소 닭보듯 하지만 나는 이런 야채들이 좋다.
마냥 부드러운 상추보다는 더 많이 심어보는 자잘한 야채들.
잘 자랄려나...

시절이 좋아져서 5월 7일날도 학교재량의 날이여서 아이들을 데리고 결혼하고 처음으로 어버이날을 앞질러 어머니들의 땅에 가보게 되었다. 길을 나설때마다 경비가 나를 앞지르고 기를 꺽게 하고 말지만 고만 눈을 감고 마음의 차양을 내린다.
나서자, 나서자. 말없이.
그것도 그녀에겐 사랑이라면 사랑이였겠지만... 눈 똘망똘망한 아이들과 오라버니를 두고 그 여자가 떠난 뒤 입성이 늘 가슴결리게 하던 오라버니가 오던 길에 큰 시장에 들러 옷 좀 사오너라 인편에 연락이 왔다. 앞 뒤 안가리고 내가 서 있는 자리가 어디인지도 모르고 그만 왁칵 눈물이 솟고 만다.
불륜도 사랑이었더냐... 너도 사람의 이름으로 걷고 다닌데니..
떠나간 여자를 머릿속에서 시위하다 보내고, 어제는 돌아오는 길에 남대문 시장에 들러 오라버니 옷을 위 아래 맞춰 두벌씩 사고 가벼운 티도 사고 그렇게 준비를 맞추었다.
조카들 옷은 지난 주에 작은 박스로 하나 사서 보냈다.
전해오는 말, 그렇찮아도 전화할려 했었다고 했다는 오라버니의 말이 민들레 홀씨만 같다. 조카들 옷을 보내면서 쪽지에 어머니와 오라버니 옷이 걸리지만 우선 아이들 것 먼저 보내드립니다.라고 썼건만 박스를 풀면서 혹여 내 옷은 없나 ... 오라버니도 눈을 빛냈을 것이다.
혼자 나가서 자기 옷 한벌씩 사서 입지 못하는 주변머리 없고 순해빠진 바보 오라버니 ...

쪽파를 숭숭 뽑아 들고온 바케스에 담고 꽃이 핀 냉이와 자잘한 풀들을 억세게 뽑아 밭가로 울분처럼 던져버리고 만다.
어둠을 밟고 왔건만 안개속에서 해가 서 있다.
한숨과 미운 마음을 밭에 버려두고 돌아선다.
어제 내린 잔비로 오늘 뿌린 씨앗이 우우 돋아날 것이다.
세월속에 설움은 삭혀져 엷어지고 씨앗들은 초록으로 꿈을 꿀 것이다.
물처럼 흐르는 시간 속에서...

흙 묻은 손을 닦고 아침을 준비하는데 남편은 또 아침길을 나선다. 어제 베란다 청소를 한 후여서 신발도 안보여 운동복도 안보여, 어디 두었느냐 ... 자꾸 묻는데 , 오늘은 어린이 날이니 운동장에 가지 말고 시골 동행하자 해도 묵묵부답으로 축구화만 ?는다. 다 내다 버렸데도 꿈쩍도 않더니 축구화도 ?아내고 운동복도 ?아내곤 아이들을 불러 시골 잘 다녀와라 .. 한 마디를 한다.
글쎄 무슨 심정이었나, 아이들 준다고 준비한 사탕봉지째, 아이들 신발, 방바닥에 널린 신문들... 밑창 갈으라 놔 둔 축구화 네짝 모두 다 입을 꼭 다물고 남편에게 던지고 만다.
나가려던 길을 들어와 언제 무슨 일이 있었느냐 시치미를 떼곤 차려둔 아침을 정답게 먹고 또 잘 다녀와라 하고 그는 운동장으로 갔다. 참 못 말릴 일이다.
우리가 시골을 다녀오는 2박 3일동안 혼자 밥을 끓여 먹고 공을 차고 회사를 다녀오고 할 것이다.그래도 그는 행복한 사나이다. 늘 혼자 아이들을 데리고 다녀서 이제는 많이 길들여졌는데도 갈때마다 나는 이렇게 자잘한 심술을 부리고 말지만, 시간이 지나면 나는 또 아이들을 데리고 그 사나이가 있는 집으로 자글거리며 목을 외로 꼬면서도 돌아올테니...
사랑이라는 이름의 목걸이를 해 걸고 떠난 오라버니의 여자는 하세월이 흘러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고... 여자에 질린 오라버니는 재혼은 생각도 하지 않고 동굴같은 눈동자와 꾹다문 입으로 바람처럼 직장을 다니고 아이들을 거느리고
마을앞 한자리에 뿌리를 내린 느티나무처럼 살아갈테니...

주섬주섬 가방을 챙겨담고 길을 나서야지.
기다릴까봐 가겠노라 전화도 하지 않았으니... 늙으신 어머니가 계시는 집 앞에 가 서서
힘껏 대문이나 발로 차볼까...
"할머니... 아이들이 부르면 부러 화난체 누가 억지로 오라해서 온 것처럼 퉁퉁 부은 얼굴로
"저 왔어요나 해볼까,.. 그리곤 그냥 애설없어서 히히 웃곤 그 주름진 손이나 잡아보고
잘 살았지요? 그렇게 물어나 볼까?
아니면 배고파 밥줘 .. 그렇게 소리나 질러볼까.
길을 나서지도 않았는데 어쩌자고 눈물이 나를 앞서나.
이러다가 해 떨어지는 건 아닌가 몰라.
(가난한 날의 행복 스물아홉번째 이야기)
2001.05.0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