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2학년 가을 어느날...
갑자기 찾아온 '급성 축농증'으로 며칠 고생하다가,
간단한 수술과 약으로 완치가 된 후, 느낀 바를 어머니께 말씀 드렸었다.
"의사 선생님이 참 고마워요.
나도 그렇게 아픈 사람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됐으면 해요!"
그 말이 끝나자마자, 어머니께서는 기다렸다는듯이 반색을 하시며
나의 진로(?)를 결정해주셨다.
"좋은 생각이다. 열심히 공부해서 의대 가면 되겠구나!"
그때까지 미래에 대한 별 뚜렷한 생각없이 지내던 나는
그 순간부터 의사가 되는 것이 그저 당연한 듯 받아들이고,
그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이민 (2)'에서 밝혔듯이, 한국에서 '의대'를 1년 다니고,
이곳에서 '의대'를 목표로 열심히하고 있었는데,
미국 대학에서 두 학기를 마치고나서 심한 갈등이 시작됐다.
수학과 화학 과목은 일주일에 두세 시간 정도만 공부해도
'A' 학점이 나왔는데, 생물학과 동물학은 20시간 이상을 파고 들어도
'C' 학점이 겨우 나오는 것이었다.
원래, 외우는 과목을 싫어했고, 공부하는 방식이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어
깊이 생각해봤으나, 결론은 한가지였다.
'이쪽 계통은 궁합(!)이 안 맞는구나!'
그런 생각이 들자, 다른 잡생각(?)들이 끼어 들어왔다.
'대학 4년 + 의대 4년 + 수련의 3년 + 전문의 2년...
그렇담, 혼자 독립할 때가 되면 30대 중반...
언제 결혼하여 가정을 꾸리나?'
'그리고, 젊을 때 하고싶은 많은 일들을 희생해가며...
과연 그만큼 할 가치가 있는 걸까?'
'하지만 이제 와서 그만 두면 그동안 들인 공은?'
'너무 쉬운 길을 택한다면, 비겁하다는 소리를 듣지나 않을까?'
그리고 제일 큰 걱정은
'어머니가 큰 실망을 하실텐데...'
며칠동안 '저울질'을 해봤으나, 마음은 점점 전공을 바꾸는 쪽으로
기울어져 갔다.
대학교 3학년 말까지 전공을 바꿀 수 있는 미국의 자유로운 대학제도도
마음을 바꾸는 데 일조를 했으리라.
"아버지, 어머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저녁을 마친 어느날 저녁, 드디어 용기를 내어 말문을 열었다.
"응, 뭐냐?"
"저, 의사 되는 거 포기하렵니다."
"뭐라고??!!"
내 설명을 다 들으시고, 아버지는 별 말씀이 없으셨으나,
어머니는 생각대로 '결사 반대' 이셨다.
온갖 이유를 들어, 해야한다고...
그래도 내가 조금도 굽힘이 없자, 어머니의 '마지막 무기'가 터져 나왔다.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그러시며 펑펑 우시던 어머니.....
그리곤 냉전이 시작됐다.
아침부터 밤까지, 나에겐 한마디도 않으시고...
눈길 한번 안 주시고...
그러시는 어머니에게 '몹쓸 짓을 하는 거나 아닌가?'하는 생각에
번민도 했으나. 나의 생각은 점점 굳어만 갔다.
'내가 사는 내 인생... 자신없는 길을 갔다가, 후회하긴 싫어!'
모자 간이 마치 남보다 못한듯...
그러길 2주여...
자식에게 이기는 부모 없다고 했던가?
어머니가 드디어 백기(!)를 드셨다.
"정말...못하겠니?"
"네!"
"...그럼, 뭘 할래?"
"공대를 가서, 화공학을 전공하고 싶습니다."
"..... 그래, 열심히 해봐라!"
그리고 그쪽 계통에서 남들 부럽지 않게 사는 지금...
자식을 위해 '욕심'을 접으셨던 어머니께 항상 감사하는 마음이다.
가끔, 한국에서 의대를 같이 다녔던 의사 친구를 만날 때마다,
'나도 그 길을 갔더라면...?' 하는 조그만 후회는 들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