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홧병


BY rjvna 2002-05-30


1.횡설수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여자가 결혼을 하면 이전의 자기의 모습을 변경하도록 강요 받는데 착한 여자 컴플랙스에 사로 잡혀있는 여자일 수록 고통은 더 심하다. 자신의 모습을 잃어 버리고 시댁이 원하는 모습으로 변해있고 자기가 아닌 다른 사람이 대신 살고 있는 듯한 느낌에 사로 잡히게 되고 무엇인지 형체도 없고 이름도 없지만 어떤 거대한 악의 덫에 걸려 숨통이 조이고 있는 듯한 느낌 속에서 살게된다.

사람이 자기 정체성을 변형하도록 강요 받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자기에게 알맞은 이름으로 불리지 못하고 자꾸 다른 이름에 답하기를 강요 받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죄수들이 교도소에 들어기면서 이름대신 번호로만 불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이런 일련의 상황들은 말하자면 자기 고유성의 부정 내지는 존재 의미의 부정이 아닐까?
내가 내가 아니라 그저 여자1, 혹은 며느리2, 몇호 아줌마로 불리는 것, 내 고유의 이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입밖에 내는 것을 금지 당하고 불려지는 것도 금지 당하고 오로지 역할로만 불려지는 것 ...그래서 그 역할이 끝나거나 시원찮거나 하면 언제든지 다른 사람으로 대체될 수 있다는 불안감을 안고 사는 것은 얼마나 끔찍하고 부당한 일인가?

2.코메디...그리고 위장된 평화

대화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가정은 상대가 대화 테이블에 나와 앉을때만 유효한 가정이다.
상대를 개라고 생각하거나 노비라고 생각하거나 상대할 가치가 전혀없다고 생각하면 대화의 필요성도 생각하지 못하고 테이블도 없고, 있는거라고는 일방적인 명령과 무조건적인 복종뿐이다.

아직도 대부분의 시어머니들의 의식 깊숙한 곳에는 며느리는 그저 '도구'이다. 밥솥이나 주걱이나 냉장고 같은 도구이다. 도구가 말하는 것 봤나? 도구나 반항하는 것 봤나? 그러나 세월이 흘러 도구도 진화해서 말을 할 수 있고 마음대로 부리지 못하다는 걸 인정 못하는 시어머니와 그 밑에서 사는 며느리는 고달프기 짝이 없다.

더욱이 무식이 무슨 훈장이라도 되는 듯 '그래 나 무식하다 어쩔래' 하고 배내미는 시어머니 앞에서 며느리는 한국말로 얘기 좀 하자는데 무식, 유식이 뭔 상관이냐고, 내가 영어로 얘기 하자는 게 아니지 않냐고 아무리 설득하려 해도 막무가내다.
해서 그저 한 집에 살면서도 서로 외계인 쳐다보듯하고 서로 합의한 문장 몇개 ...식사 하세요. 다녀오세요. 어디 아프세요 등등 채 열개도 안되는 문장 몇개로 의사 전달(소통이 아닌)을 하며 사니 겉으로는 참으로 평화로운 집안이나 위선도 이런 위선이 없으며 코메디도 이런 코메디가 없다.

3.그냥 그렇게 사소서

나이 들어 좋은 점 중 하나는 자신의 한계를 깨닫는 일이다. 무엇은 할 수 있으며 무엇은 내 능력 밖이고 간절히 하고 싶지만 포기해야만 하고, 하기 싫어도 꼭 해야 할 일들을 구분할 줄 알게된다는 것이다.
인류 역사와 더불어 발생한 가부장 제도 하에서 장구한 세월을 지나며 DNA에 각인된 남존여비 사상을 내가 어찌 지울 수 있으랴.

자신은 이 세상에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미천한 존재가 어찌어찌 태어나 밥이나 축내고 있으니 어찌 황송하지 않으리오. 그저 축생처럼 자손이나 잘 번식해 놓고...다행이 아들을 많이 나았으니 밥은 굶지 않겠군....가면 된다고 생각하는 노친네를 한때는 '계몽'시키려 노력도 해봤지만 중과부적이라.

그냥 생긴대로 살다 가소서. 도둑처럼 밥도 숨어 잡수시고, 며느리도 없는데 과일 혼자 먹었다고 꼬박꼬박 신고하시고, 외출 한번 하려면 불쌍하기 짝이 없는 얼굴 만들어 차비 타내고, 새옷은 그냥 장롱에 걸어두고 과부가 새옷을 입으면 남이 흉본다며 20년된 옷만 입으시고, 거실에 버티고 있는 아들 친구들 앞에 나서기가 부끄러워 화장실도 못가고 쩔쩔매고.......그냥 그렇게 사소서.
한번도 자신의 삶에 긍지를 가져 보지 못하고, 70이 넘도록 죽지 않고 자식에게 얹혀사는 팔자 탄식하며 죽는 날만 기다리며 사소서....

그러나 간곡하게 부탁하노니 ....당신의 손녀 딸이자 내 딸 앞에서만큼은 '기집년이......'하는 말은 제발 하지 마소서. 친구분들 앞에서 '손주가 하나 밖에 없어 ...씰데없는 거 하나하고....' 이런말은 제발 하지 마옵소서....설날에 세배돈을 준비할때도 제발 봉투 두개 준비하소서. 식탁 위에 있는 반찬 그릇을 아들 앞으로만 밀어 놓지 마소서. 당신 자신이나 며느리나 손녀딸이 먹는 거 아까와 마소서 제발.

그런 거 볼때마다 나 돌아 버릴것 같으니까.
그런 말 들을때마다 정말로 홧병에 걸릴 것 같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