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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가지를 긁으라는데........


BY 산아 2002-05-26



둘째를 돌봐주시는 시어머님께서 요즘 당신아들 
지켜보기가 조금은 위태위태한가 보다.

며칠전에는 애들 삼촌집에도 가시지 않고 
밤11까지 당신방에 있는 텔레비젼을 보시지 않고 
거실에서 텔레비젼을 보고 계신다.

애들아빠는 늦겠다고 초저녁에 벌써 전화가 왔고
늦으면 직접 열쇠로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기 때문에 
기다릴필요가 없다는 것을 어머님이나 나는 잘안다.

그리고 남편은 술을 한잔 하더라도 음주운전은 절대로 하지 않고
꼭 대리운전 시켜서 집에 오고 가족들 속썩히는 일이 없기 때문에
어머님이나 난 남편이 늦어도 별 걱정을 하지 않는다.

그런데 밤 11시까지 어머님께서 주무시지 않는 것은
며느리인 나에게 하고픈 말이 있다는 뜻이다.

내일 아침준비를 대충 해놓고 어머님께 다가갔다
"어머님 연한 커피한잔 하실래요"
"그래 연하게 물처럼 한잔줄래"
하시며 텔레비젼을 끄시고 식탁에 앉으신다.

어머님과 나와의 대화장소는 주로 식탁이다.
간편하게 티백으로 원두커피두잔을 만들었더니
"나는 이커피가 뭔맛인지 모르겠다"며 입을 축이시더니
요즘 00아빠 하는 일이 잘되지 않냐고 묻는다.

난 어머님께 사실대로 애기하기로 했다. 
최근에 애들아빠가 선배로 인해 손해본 일이며
지금 하는 일이 아직 안정되지 않고 있다는 것도
그래서 요즘 애들아빠가 평소와는 다르게 사소한 것에도
민감하게 반응해도 속상해 하시지 마라고 말씀드렸다.

내이야기를 다 들으신후 
어머님은 나보고 바가지좀 긁으란다.
당신 생각에 애들아빠 예전에 하던일 계속하면 돈도 벌수 있고 
나름대로 인정도 받는데 왜 생소한 일을 시작했냐고 하면서 
며느리인 내가 너무 남편을 봐주어서 자기맘대로 하고 싶은 일 다하는 것이라며
지금 애비 나이가 몇살인데....... 돈들어 갈일이 얼마나 많은데..
누가 요즘 자기가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사냐고......
왜 너는 아무말없이 그냥 지켜만 보고 있냐고 한다.

우리 시어머니
평소에 당신이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꾸욱 참으시고 
며느리들에게 잔소리도 잘 하시지 않고 꼭 필요한 말씀만 하시는 분이 
나에게 이 이야기를 할 때까지는 참으로 생각을 많이 하셨을 것이다
당신 아들이지만 결혼하고 한여자의 남편에다 애들아버지니 
이래라 저래라 함부로 말씀도 못하시고 속이 많이 타셨나 보다

"어머니!  애들아빠에 대해서는 저보다 어머님이 더 잘아시잖아요"
"그냥 조금만 지켜보게요"
"애들 아빠 뭐라 하지 마세요"
"저도 속이 많이 상하지만 마흔되기전까지는 지켜보기로 했어요"
"몸만 상하지 않으면 되니까 조금만 지켜보게요"

나의 이야기를 들으신후 어머님은
"나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생각은 그렇다는 뜻이다"
하시며 주무시러 가신다.

우리 어머님!  아마 당신아들이 생활비도 가져오지 못하는데다가
며느리인 내가 혼자서 생활을 다 감당하고 사는 것이 미안했나 보다. 

어머님께서 며느리보고 당신아들 바가지 긁으라는데
난 바가지를 긁을수가 없다.
성격탓이겠지만 남편과 평소에 이야기를 많이 한 탓에
남편을 이해하는데 어떻게 바가지를 긁겠는가?

조금만 자기를 지켜봐 주라는 남편의 눈길을 
무시할수도 없고 그나마 힘든 남편의 사정을 뻔히 아는데
어떻게 보면 남편의 마지막 믿는 구석인 나마저도 아내라는 
이름으로 힘들게 할수 없어 바가지를 긁지 않고 있는 것이다.

어제는 인터넷벵킹으로 남편의 통장을 보니 현금이 달랑달랑하다.
남편의 주통장이 마이너스 통장이라 걱정은 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통장의 잔액이 마이너스 보다는 프라스인 것이 든든하겠다 싶어
전에 남편이 주었던 돈을 쓰지 않고 모아둔 것이 있어
남편 통장으로 2백만원을 넣어주었다.

어머님마저 바가지좀 긁으라는데 바가지는 긁지 않고
남편 기죽을까봐 비상금 털어 통장으로 돈까지 넣어주는 내가 
어쩌면 정말 멍청하게 살고 있는지 모른다는 생각도 사실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난 착한 천사표도 아니고 바보는 더욱더 아니다.
나도 속으로는 남편에게 가끔씩 짜증날때도 있다 
내가 직장생활이 쉬운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집안일에서 해방된 것도 아니고
더구나 난 수퍼우먼도 아니다.

난 정말 집에서 애들 잘 키우고 살림 잘할 자신 있다.
다만 지금의 현실이 나를 수퍼우먼화로 강요하고 있으니
난 현실때문에 노력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가끔씩 새벽까지 고민하며 잠을 설치는 남편에게
어머님께서 긁으라는 바가지를 난 긁을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