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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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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드나무가 있는 풍경


BY 박영애 2000-11-04

아파트에 살다보면 때때로 회색빛 콘크리트 건물에 멀미가 날 때도 있다.
성냥곽처럼 네모 반듯한 모양으로 개성없이 줄지어 서있는 건물들.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이 너무도 질서 정연한 모습에 가끔은 가출하고 싶은 충동도 느낀다.
주말이면 나는 가족들과 함께 도시의 매연을 떠나 피난 가듯 가는 곳이 있다. 그곳은 남편의 고향. 내가 며느리라는 이름을 하나 더 가지게 되면서 수시로 드나드는 곳이다. 그곳엘 가면 '이어도'에라도 간 듯 웬지 마음이 느긋해져서 이곳, 저곳을 기웃거려 본다.
현관문을 나서면 수줍은 듯 발그레한 빛으로 고개숙인 나리꽃,어떠한 세파에도 항상 순결한 모습으로 섰는 옥잠화, 보라빛 향기를 풍기는 도라지꽃, 야트막한 담장을 기어올라 하늘을 바라보는 수자폰 같은 호박꽃, 키 큰 향나무는 기나긴 세월동안 변함없이 시댁의 문간을 지키며 집안의 속내를 훤히 꿰고 있다. 작년엔가 어머니께서 아는 집에서 얻어다 심었다는 능소화는 향나무를 감고 올라가 곳곳에 꽃을 피워 먼 곳의 이야기를 주워 듣는 듯 여러 방향으로 꽃잎을 열고 있다.
마당을 그렇게 한참 기웃거리고 나면 나의 발걸음은 어느새 대문 밖 버드나무 곁에 가 있다. '처음 심을 때는 회초리처럼 가느다란 나무였는데 오랜 세월을 지나오며 아름드리 거목이 되었다.'는 아버님의 말씀을 들었다. 그 버드나무 아래에 서면 전설 속의 신선들이 떠오른다.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른다.'는 속담이 생겨날 정도로 신선들의 이미지는 우리들에게 '한가로움'과 '여유'를 떠올리는 단어들이다.
버드나무는 특히 여름이면아주 멋진 풍경을 만들어 낸다. 길다란 머리채를 늘어뜨린 채 바람결에 살랑이는 모습이며, 나절의 햇살이 열기를 더해갈 때 쯤이면 넉넉한 그늘을 만들어 준다. 나는 종종 시댁에 갈 때마다 버드나무 그늘 아래 서서 자연의 소리를 감상하기를 잊지않는다.
버드나무 아래에는 일말의 욕심도 견제도 미움도 없는 넉넉한 대지의 숨소리만이내마음 속으로 전해져 온다. 평상을 펴고 앉으면 뒷산 야트막한 산자락을 달려나온 바람이 비단결같이 온몸을 감쌌다. 이따금 골짜기에서 오수를 즐기다 날아 온 잠자리 날개에 어릴적 굼들이 실려오고, 올려다 본 하늘에는 뭉게구름이 솜처럼 떠다니며 그림을 그려놓으면 하늘은 더욱 더 파랗게 바탕색을 칠한다.
여름 한 낮, 내리쬐는 태양의 열기로 대지는 후끈 달아오르고 매미소리가 자지러져갈 무렵. 버드나무 아래에서는 그 너른 들판의 더위를 느끼지 못한다. 자연의 바람이 도시의 에어컨 바람보다 더 시원하고 부드럽게 온 몹에 감겨들어 버드나무 아래는 뙤약볕 아래에 서있는 것보다 2-3도 정도는 낮은 온도를 느끼게 된다.
길 옆 고추밭에서는 가지를 3번이나 매어 주어야 할 정도로 훌쩍 자란 고추가 주렁주렁 열매를 달고 해바라기를 한다. 그 인고의 시간들로 고추들은 더 좋은 품질로 5일장의 저자거리에서 새로운 주인을 기다릴 것이다.
가끔 버드나무 아래에 서서 이 다음 나의 아이들이 나처럼 서있게 될 날을 상상해 보기도 한다. 아버님께서 심으신 버드나무에서 그 아들이 귀고, 또 손자가 귀고 그렇게 세월은 가리라.
너무 햇볕이 따가워 일하기를 포기하고 들에서 돌아오신 어머님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버드나무 밑이다. 뒷 집 흰둥이가 새끼를 여덟마리나 낳았다는 이야기며, 올해 고추 농사가 풍작이라는 반가운 소식도, 윗마을 울보XX가 시집가서 떡두꺼비 같은 아들을 낳았다는 이야기, 주름투성이인 얼굴에 함박 웃음을 머금으시며 풀어놓으시는 동네 아주머니들과의 크고 작은 에피소드.
버드나무 그늘을 중심으로 죽 둘러서서 나누는 이야기는 바테서 돌아오는 동네 아주머니들까지 합세해서 진진하게 이어진다. 도시에서와는 전혀 다른 화제 거리다. 주로 농사에 관계 된 이야기가 많지만 그 이야기는 매일 비슷한 이야기임에도 늘 다른 색깔로 대화의 맛을 더해 준다.
버드나무 아래에 서면'아낌없이 주는 나무'라는 동화가 생각난다. 시댁 옆의 버드나무는 그늘을 주고 대화의 장소를 제공해주고, 초원 위에 아담하게 자리잡고 있는 이층 양옥집과 함께 멋진 그림까지 선사해준다.
버드나무는 해가 갈수록 더욱 더 많은 나이테를 갖게 될 것이다. 부모님도 세월 흐름 속에 거부할 수 없는 세월의 흔적들을 지니게 될 것이다. 나와 나의 아이들 또한 지금과는 다른 모습으로 그 버드나무 아래에 서게 될 것이다.
버드나무가 있는 풍경. 그 풍경은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더 멋진 풍경을 연출하게 될 것이다. 버드나무가 있는 풍경과 함께라면 내 모습이 백발이 될지라도 결코 후회하지 않으리.
읽은 후 소감 좀 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