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강을 따라 떠나면…
때로 지나친 것이 분명한 이 봄, 시야의 끝에 아스라이 걸린 산은
꽃들로 다시 단장을 하고, 진달래의 질박한 내음이 숲 사이를 떠
돕니다. 그 향기로 하여 웅크리고 있던 당신에 대한 망각들이 무
장해제를 당합니다. 시간이 강을 따라 떠나면 그리움이 나룻배를
타고 기슭에 다다릅니다. 지금 산에 가득한 것은 당신을 향한 그
리움 이었습니다.
키 큰 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는 산책로에서 잠시 멈추어 서며 호
주머니에 손을 넣습니다. 푸른 융단 같은 잔디밭 한 가운데로 무
슨 공사가 한참입니다. 서늘한 그 가운데 피같이 붉은 흙입니다.
녹색의 잔디가 아무리 번성하고 얌전한 흙이 가로 덮으려 애써도
아무리 애를 쓰고 또 공을 들여도 깊이 팔수록 붉고 붉은 열망의
상처 같은 흙이고 또 추억입니다.
당신을 그리고 당신에 대한 기억과 부서지는 당신의 미소, ‘당신
너무 사랑해요 나 안아주어요.’ 그 음성을 잊고 묻고 떠나보내려
온갖 노력을 다하였습니다. 정말 입니다. 나는 최선을 다 하였습
니다. 그것은 생존에 대한 절박한 문제 였으므로 나는 다른 도리
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때로 나는 당신을 잊은 것처럼 하루를 보
내고 겹도록 이틀도 보냅니다.
그러나 꽃 한 송이에 코를 대거나, 늘 함께 마시던 블루 마운틴
한잔에도 나는 내 마음의 공터에 생각보다도 훨씬 큰 웅덩이가
만들어 지는 것을 보고, 그 속에 노을같이 타는 그리움이 아직도
우울한 눈망울로 조금도 변함없이 응시하는 슬픔으로 고이는 것
을 짐작하며 무너져 내리고 가라 앉습니다.
눈앞에 하얀 꽃잎이 너울거리며 떨어집니다. 올려 보니 어질 하게
높다란 목련입니다. 왼쪽에도, 오른쪽에도 그리고 양 어깨 위에도
나비 인양, 목련이 떨어지고 있어서 나는 힘이 들었습니다. 이 봄
이 힘들고 떠나는 당신을 뒷모습을 잡지 못한 채 망막에만 새겨
버린 나의 못난 구석이 더욱 도드라지게 못나 보여서 참 많이 힘
들었습니다.
아마도 나를 잊고 이 봄보다도 더 환하게 빛나는 미소를 띄우고
있을 떠난 당신을 생각하니, 그래 차라리 잘된 일 일지도 모른 다
는 생각을 합니다. 당신이 눈 앞에 있을 때에도 그리움은 여전하
였는데 어디선가 벗 꽃의 아래를 거닐다 당신을 마주치게 된다면,
아마 멈추어진 이 시간이 그래서 거꾸로라도 돌게 된다면, 그저
숨을 쉬는 이 그리움이 마저 깨어 진다면, 살아 있는 채로 타버리
는 고통을 발끝에서부터 느끼게 될 것임을 나는 이미 알기 까닭
입니다.
문득 손가락 끝이 뜨겁습니다. 필터까지 다다라 버린 담배 끝이
마지막 숨을 몰아 쉬고 있었습니다. 길가에 놓인 칠이 벗겨져 더
욱 낡게 보이는 작은 의자에서 일어나 천천히 걷는 어깨 위로 다
시 꽃잎이 눈처럼 흩어져 내립니다. 이윽고 현실에 다다르는 계단
을 오르다 중간쯤에 멈추어 섰습니다. 더 오르지도 그렇다고 내려
가지도 못하고 엉거주춤 그렇게 섰습니다.
한숨으로 돌아본 산은 봄 꽃으로 아름답게 타오릅니다. 온몸이 타
버릴 정도로 새파랗게 타오르는 당신을 향한 그리움이고 아마도
당신이 없이 이 행성에서 당신을 그리며 보낸 또 하나의 봄으로
만 기억이 될 것 입니다.
Argus calmas가 맴도는 소용돌이 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