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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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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H이야기 -5.(남편들의 넑두리)


BY hl1lth 2001-04-14

5.-남편들의 ??두리


친척집 결혼식에 들러 축하 인사를 하고
미뤘던 볼일을 본 후
지하철 5호선을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신문도 없고, 마땅히 들고 나온 책도 없어서
그저 멀뚱거리며 앞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요리조리 ?센?보고 앉쟎는데
40대 정도 되어 보이는 아저씨들이
한꺼번에 전철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아마도 5호선 지하철을 관리하는 직원인 듯 싶었다.
여섯 분이었는데 내 앞쪽에 쭉 늘어서서는
자기네끼리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일부러 들으려고 했던 건 아니었지만 듣다보니
말씀들을 너무 재미나게 하셔서 나와 주변의 사람들은
각기 저도 모르게
그분들의 이야기 속으로 빠져 들고 있었다.
처음엔 고장난 자동문 때문에 그것을 어떻게 하면
신속하고 정확하게 고칠 수 있는가를 함께 고민하셨고
문이 자주 고장나는 원인으로
자동문사이에 순간의 탈출을 요하는 소매치기들이
무리하게 가방을 끼워 문을 열게 하려는 시도를 하거나
학생들이 장난으로 나무 젖가락 등을
끼워 넣는 것 때문인 것 같다는 말씀들을 하셨다.
그런 사람들도 있구나 생각하며 듣자니 이야기는
샛길로 빠져들고 있었다.
퇴근길에 출출한지 그냥 집에 들어가기 섭섭한 듯한 한 아저씨가
"우리 동대문 역에서 내려 보쌈에 소주 한 잔 하고 갈까?"한다.
"아, 그러고 싶긴 한데 내일 생각해서 오늘은 일찍
들어가 봐야 돼요."
아, 참으로 성실한 가장이구나.
우리 남편도 저런 생각을 갖고 살아가는 걸까?
순간, 이어지는 아저씨의 말씀은 나의 뒷통수를
치고 있었다.
"내일 교대로 쉬는 날이잖아요. 오랜만에 마음놓고 코가
삐뚫어지게 먹고 싶은데 그러려면 오늘 마나님한테
잘 보여야 하거든요."
"그럼, 아예 오늘 저녁 코가 삐뚫어지게 먹고 내일은
조신하게 집에서 쉬는 거이 어떨란가?"
"왜요, 오늘 한 잔 하시고 싶으세요?"
"아니, 입맛이 없어서 밖에서 먹고 들어갈까 싶어서. . ."
"입맛이 없으면 댁에 가셔서 마나님께 맛난 것 좀 해 달라고
하시쟎구 왜 바깥 음식을 드시려구 하세요?"
"결혼 10년까지는 잘 챙겨 주더니만 요즈음은
국 한번 끓여 놓고 사나흘, 찌개 한번 끓여 놓고
일주일. . .그러니 집에 가서 밥이 묵고 싶겄나?
그래, 어쩌다 입맛 좀 돌릴라고 밖에서 밥이라도
먹고 들어가면 왜 바깥에서 밥을 먹고 다니냐고
난리를 치니. . ."
서글프다는 표정을 짓는 아저씨에게 다른 아저씨가
고백하듯 말한다.
"사실은 저도 그래요. 콩나물 국 한번 맛있다고 하면
일주일, 미역국 끓여 놓고 사나흘.
그래도 미역국은 내가 좋아하는 국이라서 그나마
다행이다 싶은데 왜 그 넘의 콩나물국을 일 주일씩이나
갖다 주면서 먹으라는지. . .
차라리 미역국이면 좀 참을 만 할껀디. . ."
"참, 남자들 신세 고단하쟎여?
이건 순전히 돈 벌어다 주는 기계지, 이 집에서
내가 뭔가 싶기도 하구, 참 늙어 갈수록 처량해
진다니까."
"맞아요, 밖에서 직장상사 눈치 보며 받는 스트레스도
엄청난데, 함께 살자고 데려다 놓고 잘 해 주지도
못하는 마누라한테 공연히 미안해서 이눈치 저눈치
보다 보면 내가 뭐하구 사는 건가 싶기도 하구. . ."
"모처럼 하루 쉬는 날도 맘 놓고 쉴 수가 없어요.
쉬는 날은 쉬는 날대로 아이들하고 와이프한테 봉사 안한다고
어찌나 볶아대는지 정말 피곤해요."
"맞어, 조금 늦게 들어가면 이건 바람 난 것 아닌가
색안경 끼구 닥달하구. . ."
"아 그리고 시집 식구들한테 웬 불만이 그리 많은지,
그리고 둘 문제, 둘이 해결하면 될 걸 왜 자꾸 나는 중간에 낑겨놓고
난처하게 만드는지, 정말 짜증난다니까."
아저씨들의 신세타령은 끝이 날 줄 몰랐고 급기야
"아, 술이나 한 잔 하시구덜 들어갑시다."
로 결론이 나서 그 아저씨들은 동대문에서 모두 내리셨다.
옆에서 본의 아니게 듣고 있던 사람들 표정은
나름대로 각기 달랐다.
같은 처지의 아저씨들은 "에이, 나도 술이나
한 잔 하고 갈까?" 하는 표정이었고
아가씨들은 "난 시집가서 내 남편한테 저렇게는 안 해"
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우리 아줌마들은 죄다 눈을 감고 자는 척들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안다.
나도, 그 아줌마들도 자고 있지 않는다는 것을.
요사이 나도 국 한번 끓여 놓고 솔직히 이틀을 넘길 적도 있다.
아까워서 그러는 부분도 있긴 하지만 이제는
귀챦고 꽤가 나기 때문이기도 했다.
매일 매일 끼니때마다 무슨 국을 끓일까,
뭔 반찬을 해야 하나 하는 것을 일년 삼백 육십 오일
하루도 거르지 않고 십 오육 년을 했다고 생각해보면
그럴 수도 있는 일 아니냐고 나 자신에게 당당한 채
해 보지만 어쩐지 뒷골이 땡긴다.
그래도 난 식구들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강박관념과
평생을 전쟁터 같은 사회 속에서 경쟁하며 스트레스를
받고 있지는 않았던 것이다.
물론 작은 가정 속에서의 여러 가지의 인간관계로 인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생존을 걸고 있는 인간관계에서의 치열한 스트레스는
남편 덕으로 면하고 있는 것이 사실인 것이다.
아, 갑자기 내 남편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잘해 주고 싶었다.
당신이 최고라며 등도 두들겨 주고 싶구
사랑한다며 간지럽게 굴고도 싶었다.
지하철에서 내린 나는 시장으로 향했다.
오늘 저녁엔 맛있는 쑥국에 달래도 무쳐 놓고
고추장으로 양념을 한 두루치기에 소주 한 병을
준비해야지.
공연히 마음이 바빠진 난 잰걸음으로
집을 향해 걷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