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고속도로 정읍IC 벗어나면 부안 변산가는 이정표를 따라 직진을 한다
지나는 길에 김제 벽골제를 바라보며 호남의 넉넉함이 풍부한 먹거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생각하며 새만금의 전망대에서 내좁은 망상을 접고 있었다
그 넓은 갯벌을 메워 어마어마한 부가치를 창출한 그 많은
생산력을 바라보며 우리인간의 힘이 대단함을 느끼기에 앞서
하느님이 지어내신 자연본연의 모습을 그렇게 바꿔놔도 우리에게 돌아올 피해가
그 더 넓은 땅에서 얻어지는 가치에 비해 손해보지 않은 범주일까
한번 파괴한 자연은 영원히 되돌릴 수 없음으로 이미 우리인간은 손해를
보고 있는게 아닐까
(변산의 비경 채석강)
변산반도의 푯말을 따라 서해의 갯벌과 해변의 몇몇 발자국을 지나치며
격포 해수욕장을 끼고 변산반도 제일의 비경 채석강이 눈안에 들어왔다
많은 사람들이 바다에 접해있는 채석강을 와 보기 전에는 강으로 오인한다
층층 해안절벽이 책을 켜켜이 쌓아놓은 형상같이 보인다
마침 물때가 좋았다 저만치 멀찍이 물러나 있는 바닷물이 온전히 채석강을
드러내고 있었다 날씨도 너무 포근하여 백사장을 거니는 것도 채석강을
바라보며 밀려오는 파도소리에 귀 기울려 세상 잡념 벗어 던져 나만의 황홀경에
젖어보고 싶었다
검은 띠를 겹겹이 두르고 흰 파도와 절벽 위에 푸른 소나무는 작은 가슴으로
안기에는 너무 차고 넘치는 풍광이었다
해가 한 자락 치맛자락을 끌 듯 조용히 수평선으로 잠겨들고 있었다
카메라를 챙겨들었다
서해안의 낙조를 얼마나 고대했던가
네 모습이 보고싶어 벼르고 벼르지 않았던가
아직은 해가 수평선 그 넓은 가슴팍에 안길려면 한뼘은 더 남아 있었다
허기가 밀려왔다 해변가에 포장마차에서 오징어 한 마리 구워 올
동안 설마 해는 나를 기다려 주겠지
걸음을 재촉하여 오징어를 씹으며 다시
채석강에서의 환상적인 일몰을 꿈꾸었다
그러나 어쩌라 나의 수양이 부족한 탓일까 햇님은 그 열정적인 자신의 얼굴을
더 이상 세상 사람들 앞에 보여주지 않았다
구름이 그의 얼굴을 가렸고 수평선은 말없이 그런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채석강에서의 몇천원짜리 쇼를 난 결국 구경하지 못하고 아쉬운 발걸음을 돌렸다
서해안의 별미인 백합죽의 담백한 맛을 음미하며 변산에서의 밤은 깊어가고 있었다
낮설은 고장에서의 밤은 취객의 주정소리에 날이 새고 있었다
(내소사 가는길의 숲길)
능가산 내소사를 향해 가는 해안도로는 드라이브 길로 질퍽한 갯벌의 냄새가
차창밖에서 부터 코끝을 자극한다
내소사 주차장에서 절까지 가는 길에는 아침안개에 젖은 키큰 나무사이로
아침햇살이 신비로운 빛을 발하며 반짝이고 있어 묘한 기운 마져 감 돌았다
하늘로 치솟은 주목인지 전나무인지는 잘 모르지만 그 향이 어찌나
맑고 청아한지 불자가 아닌 어리석은 중생은 혹여 부처님의
지비의 향이 절집을 찾는 미혹한 나를 마중이라도 하는냥 그 향에 취해 그윽한
그 분위기에 취해 마음은 절로 백팔번뇌 오만가지 욕심으로부터
조용히 나를 정화하는 것 같았다
삼림욕같은 숲길을 지나 일주문에 이르니 우리나라 토종 왕벚나무들이
양옆으로 늘어서 오가는 이들을 맞아준다
봄,가을의 내소사가 얼마나 아름다울지 짐작이 간다
봄이나 가을쯤에 다시 오고프다
내소사 경내앞에 여늬 시골마을의 당산목 같은 아름드리 당산목이 눈에 띄어
낮설지 않은 정겨움이 있었다
(내소사 전경)
내소사는 백제 무왕 34년(633)에 혜구두타가 소래사라는 이름으로 창건했다고 전한다.
대부분 부속건물들이 조선시대 축조된 건물들로 다른 절과는 채색이 단아하고
고풍스러운 것이 요란하지 않아 좋았다
절 경내로 들어서면 봉래루를 따라 대웅전으로 오르는 통로로 연결된 이건물의
기둥을 받치고 있는 주춧돌에 눈길이 갔다
막돌을 가져다 가공하지 않고 쓴 것 같이 그 형태와
크기가 참 다양하여 자연스런 아름다움이 있어 기억에 남는다.
봉래루를 올라서면 넓은 안마당이 나오고 그 정면에 대웅전이 그 고풍스런 자태로 서있다
대웅전은 화려한 다포계 건물로 양식상 그 건축시기는 조선중기 이후로 본다
조선 인조 11년 (1633)에 건립되었다고 전해지며 자연석으로 쌓은 축대위에 낮은 기단과
거의 다듬지 않은 주춧돌을 놓고 세운, 배흘림양식의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단층 팔작지붕 집이다.
법당 내부의 제공 뒤뿌리에는 모두 연꽃 봉우리를 새겼으며 정사각형 격자 문양을 한
천장의 가득한 꽃무늬 단청과 더불어 법당 안을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다.
부처님이 설법하실 때 하늘에서 꽃비가 내렸다는 그 설화를 그대로 옮겨온 것이다.
(대웅전 문의 연꽃문양)
내소사 대웅전의 특색은 못을 쓰지 않고 깍은 나무를 끼워 맞춰 지은 건물과
대웅전 부처님 뒷 벽면에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백의 관음보살님의 벽화가 그려져 있으며
대웅전의 문살이 연꽃, 국화꽃, 해바라기꽃 등 문양을 새긴 아주 아름다운 형태로 보존되고 있다
고찰답게 채색은 지워져 나무결 무늬만 남아있지만 소박하고 단아한 본래의 아름다움을 보는 것
같아 더 느낌이 좋았다.
꽃잎 하나하나에 새겨진 옛님의 숨결과 부처님의 자비가 그윽하게 배어나는 같아
내소사의 아련한 그 정취를 두고두고 잊지 못할 것 같다
(내소사 대웅전 보물 제 291호)
대웅전에 얽힌 전설이 불심약한 중생의 마음을 숙연하게 한다
청민선사가 이 절을 중건할 때 목수를 불렀는데 그 목수가 3년 동안을 말한마디 않고 건물을
지을 나무만 깍고 있었다 한다
묵언 수양을 하고 있는 것인 줄만 알고 사미승이 장난기가 돌았다.
목수 몰래 나무토막 하나를 숨겨놓고 모른채 했다.
모든 나무를 다 깍았다고 생각한 목수는 드디어 나무를 헤아렸고 부족한 것을 안 목수는
자신의 수양이 아직 부족한 것으로 생각해 청민선사에게 절을 지을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자 선사가 그 부족한 한토막은 이절과 인연이 없는 것 같으니 그만 생각을 바꿔 절을
지어 달라고 사정했다.
목수가 할수 없이 남은 토막만 가지고 절을 지었다.
지금도 법당안에 오른쪽 윗부분 내 5출목의 한부분이 비어있다.
절을 지었으니 단청을 해야 할 것이 아닌가.
어느날 한 화공이 찾아와 단청을 해주겠다고 선사에게 이야기 하면서
100일 동안 어느 누구도 건물안을 들여다 보아서는 안된다고 했다
그래서 선사와 목수는 교대로 그 건물 앞에서 밤낮으로 지켰다.
99일이 지나도록 인기척도 없고 먹을 것도 안들어 가니 사미승은 궁금해서
견딜수가 없었다
사미승은 또 참지 못하고 목수가 지키고 있을 때 주지스님이 부른다고 거짓말을 하고
안을 들여다 보았다.
그러자 법당안에는 희안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하얀색 새가 입에 붓을 물고 날개짓에서는 화려한 물감 만들어 내면
서 그림을
그리고 있지 않은가.
너무 놀란 사미승은 자세히 보고싶어 문을 살짝 열었다.
그러자 삐걱하는 소리에 놀란 새는 그만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단청을 완성하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대웅전 안에 좌우 한쌍으로 그
려져야할 그림이 좌측
창방위는 바탕면만 그려져 있고 내용은 그려져 있지 않다.
그 새를 사찰에서는 관음조라고 한다.
지금도 새벽녘에 우는 그 새가 관음조라고 한다.
목수나 관음조나 모두 관음보살께서 현신하신 것이라는 설명이다.
절에는 각절마다 전설이나 특색이 있다
그런사전지식을 알고 절을 방문하면 훨씬 그절만의 특색있는 아름다움에
감탄할것이다
(내소사 삼층석탑)
내소사를 나와 다시 부안쪽으로 오르다 보니 곰소만의 젓갈가게가 즐비하다
우리 나라에서 몇군데 안남은 천연염전이 좌측으로 눈에 들어온다.
지금은 싸구려 중국산에 밀려 겨우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이곳 염전이 오래도록
우리것을 지켜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옆으로는 시커멓게 낡은 소금창고가 늘어선 염전에는 겨울이라 그런지 물만 담겨있고
햐얀 소금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부안 곰소 염전과 소금창고)
변산을 떠나며 이런 것이 여행을 즐기는 묘미구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갯벌이 주는 유형무형의 소득과 자연의 조화 그자연을 적적히
이용하는 인간의 지혜 그리고 다함께 살아가기위해 자연을 보존해야할 의무까지
인간이 감당해야할 책임이란 것을 봄이나 가을쯤에 다시한번 찾아오리라는
나만의 약속을 다짐하며 아름다운 고장 풍요로운 변산을 떠나오며
다음여행지로 차를 몰았다
*찾아가는 방법
서해안고속도로부안IC
1. 부안(30번국도) →변산해수욕장 입구(10km) →격포
2.구암리 고인돌 - 새만금 간척지 - 변산해수욕장 - 채석강 - 내소사 - 곰소만
*서해안 고속도로 줄포IC
3.개암사 - 곰소만 - 내소사 - 채석강 - 변산해수욕장 - 새만금 - 구암리 고인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