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동네에 작은 집이 두 집이었다.
예전에는 큰 집, 작은 집의 유대관계가 훨씬 밀접했던 것 같다.
두 작은 집 식구들이 우리 집에 모여 함께 식사할 때가 많았다.
모내기, 한벌 두벌 세벌 김매기, 추수하기, 나락 훑기, 초가지붕 갈이, 보리 파종, 보리밭 북돋우기, 보리걷이, 보리 훑기, 이런 저런 밭 작물 가을 걷이, 누구 누구 생일...등등 세 집 식구가 모일 일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심지어 작은 집 모내기며 추수할 때도 우리 집에서 모여 식사를 하였다.
나는 모든 큰 집은 의례 그렇게 하는 것인 줄 알고 자랐다.
자연히 사촌들 끼리 자주 어울려 놀게 되었다.
어린아이들이란 잘 어울려 놀다가 싸울 때도 있기 마련이다.
어른들은 모두 들에 나가 일하거나 바빠서 우리가 놀건 싸우건 관심을 보일 틈이 없었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달랐다.
평생 농사일 하곤 거리가 멀기도 하였지만, 나이가 들어서 집에 있는 시간이 많으니 자연 우리들이 놀거나 싸우는 일에 관심을 보일 때도 있었다.
사촌들이나 우리나 할아버지에겐 똑 같은 손자, 손녀이건만 할아버지는 그렇게 대하지 않았다.
우리 모두가 느낄 수 있도록 편애를 하였다.
우리가 놀고 있을 때 할아버지가 외출에서 돌아오는 것을 보면 나랑 동갑이던 사촌은 이렇게 말했다.
"저기 봐, 저기 너네 할아버지 온다."
나는 한 번도 할아버지가 사촌들의 할아버지가 될 수 도 있다는 생각을 해 본 것 같지 않다.
어느 날 사촌이 하는 말을 들은 할아버지가 사촌에게 이렇게 물을 때 까지는...
"성윤아, 그럼 너네 할아버지는 누구지?"하고...
할아버지는 작은 집 아들들보다 큰 집 딸들을 더 귀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같았다.
그런 할아버지에게 큰 집의 단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이 얼마나 귀했을까는 짐작이 된다.
둘째 작은 집도 우리 처럼 딸 셋, 아들 하나였다.
작은 집 외아들인 희섭이는 큰 집 외아들인 성옥이 보다 한 살이 어렸다.
하루는 이런 일이 있었다.
마당에서 놀던 희섭이가 성옥이를 싸리비로 때렸다.
마루에 앉아 이 모습을 본 할아버지는 희섭이를 크게 꾸중하였다.
어린 것을 그렇게 모질게 때리면 어떻게 되겠느냐고...
할아버지 말을 들으면 희섭이가 성옥이 보다 나이가 많아도 한참 많은 것으로 착각할 만큼 할아버지는 성옥이의 역성을 들었다.
어머니와 함께 우물가에서 푸성귀를 씻던 작은 어머니가 뛰어와 희섭이를 매로 때려 주고서야 할아버지의 노여움이 풀렸다.
희섭이가 성옥이를 아프게 때린 것도 아니었다.
그저 조금 때리는 시늉을 한 것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 날 저녁식사 시간이었다.
희섭이네 식구하고 우리하고 함께 식사를 하게 되었다.
할아버지하고 할머니는 방에서 겸상을 하고, 아이들은 마루에 앉아 먹고 있었다.
희섭이가 성옥이가 좋아하는 음식에 손을 댔다고 성옥이가 희섭이 머리를 숟가락으로 때렸다.
얼마나 세게 때렸는 지 희섭이 머리에서 딱 소리가 났다.
희섭이가 머리를 감싸쥐고 바닥에 털썩 주저 앉으며 앙... 소리내어 울었다.
당연히 성옥이는 어머니에게 엉덩이를 맞았다.
이 소동을 들은 할아버지가 방 안에서 물었다.
무슨 일이냐고...
다른 아이들에게 설명을 들은 할아버지는 말했다.
"거, 시끄럽다. 그 어린 것이 때려서 아프면 얼마나 아프다고 울고 요란이냐 요란이... "
할아버지는 누가 나이가 더 많은 지를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그렇게 말했다.
성옥이는 하나 밖에 없는 당신의 귀한 손자고 희섭이는 당신과 전혀 상관 없는 아이인 것 처럼 그렇게 하였다.
그래도 작은 어머니는 불평 한마디 없었다.
작은 아버지도 불평하지 않았다.
그런 할아버지 때문에 우리가 밉기도 하련만 우리에게 언제나 친절하고 다정하였다.
우리하고 사촌들 사이에 싸움이라도 날라치면 작은 어머니는 서둘러 사촌들을 야단치곤 하였다.
잘못이 누구에게 있건 상관하지도 않고...
내가 결혼할 때 어머니는 그랬다.
오남매 맏이하고 결혼하겠다는 막내딸에게 이렇게 말했다.
맏이가 괜찮은 것이라고...
힘들기는 하지만 그 만큼 보람있는 자리라고...
팔남매의 맏이인 아버지를 만나 힘들게 살았을 어머니가 그렇게 말했다.
둘째 작은 아버지는 술에, 노름에 가산을 몇 번 씩 탕진하고 아버지가 새로이 살림을 내 주어야 하였다.
고모는 다섯 중 넷이 잠시라도 친정살이를 하였다.
그 속에서 우리 어머니 마음 고생, 몸 고생은 짐작하고도 남는다.
그래도 단 한 번도 그 것을 불평으로 입에 올리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작은 어머니도 인내심이 많은 사람이었지만, 우리 어머니 역시 대단한 인내심의 소유자였음이 틀림없다.
작은 어머니와 어머니가 고맙다.
형제간의 우애와 인내를 삶으로 보여주어 참으로 고맙다.
나 아닌 다른 사람과 어울려 사는 게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느끼며 살 때가 많다.
할아버지의 편애가 아니라도 어머니와, 작은 어머니 사이에 마음 불편한 일이 참 많았을 것이다.
그래도 두 사람은 그 것을 겉으로 들어내 보인 적이 없었다.
작은 집에 쌀이 떨어지면 어머니는 아버지 몰래 작은 집으로 쌀을 퍼 나르곤 하였다.
작은 집 식구 고모네 식구들로 한 시도 조용할 날이 없는 것을 불평하는 막내딸을 어머니는 타이르곤 하였다.
그런 것을 고맙게 여기라고...
우리 집에 먹을 것이 없으면 작은 집 식구도 고모네 식구도 찾아들지 않는다고...
굶는 집이 수두룩한 세상에 친척들과 나누어 먹을 수 있으면 감사할 일이라고...
돌이켜 보니 그렇다.
어린 시절이 풍성하게 느껴지는 것은 먹을 것이 많고 입을 것이 많아서 였던 것은 아닌 것 같다.
이런 저런 추억거리들이 내 삶을 풍성하게 하는 것이 아닐까?
예전 처럼 친척들이 모여 사는 세상이 더 이상 아니다.
남은 내 삶은 어떻게 풍성하게 엮어갈 것인가?
가까이 사는 이웃들과 나누는 삶을 살고 싶다.
때론 내가 억울하고, 손해 보는 것 같아도 참고 견디는 삶이 아름다운 삶으로 다가온다.
어머니를 바보 같다고 비난하던 막내 딸도 이제 나이가 들고 산다는 게 무엇인지 조금씩 깨닫는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