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버작가

이슈토론
창업박람회 65세 이상 관람객 단독 입장 제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배너_03
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조회 : 407

어렸을 적 이야기...[2]


BY ns05030414 2001-11-30

몇 년 만에 미국에서 돌아와 찾아간 고향집에서 나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그 곳은 폐가처럼 변해 있었던 것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아버지 마저 떠난 그 집은 내가 그리던 고향집이 아니었다.
항상 추억 속에 그리며 마음이 따뜻해지던, 꽃이 있고 나무가 있고 햇살 가득한 장독대가 있던 그런 집이 아니었다.
꽃이 피고 나무가 자라던 정원에는 허접쓰레기 같은 물건들이 쌓여 있었다.
그 집에 살고 있는 사람이 시골장터를 돌아다니며 파는 물건이라고 하였다.
집도 오랫동안 돌보지 않아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하였다.
어머니 아버지가 없어서가 아니고, 내 추억 속의 고향집을 잃은 슬픔에 나는 억장이 무너지고 있었다.
한참을 울고나서 입술을 깨물며 결심했다.
다시는 찾아오지 않겠다고...

그러나 난 내 고향집을 영영 잃어버릴 수 없다.
이대로 그냥 잃어버릴 수 없다.
그래서 이 곳에 그려보기로 한다.
아무도 빼앗아 갈 수 없는 곳에 어머니랑 아버지랑 언니들이랑 동생이랑 함께 살고 있는 고향집을 그려둘 것이다.
가능하면 세세한 부분까지 그려낼 수 있기를 바란다.

할아버지는 생전에 항상 말씀하시곤 하였다.
우리집 집터가 눈 밝고 귀 밝은 곳이라고...
할아버지는 우리집을 살 때, 집이 마음에 들어서가 아니고 집 터가 마음에 들어서 샀다고 하였다.
우리집에서는 동네에서 무슨일이 일어나고 있는는 지 훤히 알 수 있었다.
나즈막한 산자락을 깔고 앉은 우리 동네는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었다.
산에서 흘러내리는 개울 물을 따라 집들이 늘어선 형태로...
윗동네 끝에 자리 잡은 우리집에선 자연히 낮은 곳에 위치한 아랫동네가 잘 보였다.
바로 집 앞 개울에는 빨래를 하기 위해 동네 아낙들이 모여 들었다.
바로 산 밑에 위치한 앞멀(앞마을)과 메미티(뫼밑), 동네 앞 냇가를 지나 신작로를 따라 생긴 동네인 앞거리, 이웃마을인 은석동이 훤히 보였다.
우리 동네와 은석동 사람들이 농사 짓는 논들도, 산자락에 위치한 밭들도, 한 눈에 다 볼 수 있었다.

윗동네 끝에 위치한 집이라서 바로 산 밑에 자리한 앞멀까지 사이엔 집들이 없었다.
논과 밭이 있을 뿐...
그래서 우리집은 다른 집과 달리 대문을 나가 왼쪽으로 돌면 넓은 채마밭이 있었다.
논으로 쓰일 수도 있는 땅이었지만 바로 집 옆이라 밭으로 사용한 것이었으리라.
우리는 그 것을 텃밭이라고 불렀다.
구멍가게 하나 없는 시골 동네에서, 텃밭은 우리에게 군것질거리 간식거리를 제공하는 곳이었다.
유난히 땅과 친해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 곳이기도 하였다.

대문을 나서면 오른쪽에 단감나무가 서 있었다.
월이감으로 불렸던 유난히 알이 굵은 감이었다.
단감나무가 귀했던 시절이었다.
동네를 통 털어 몇 그루 되지도 않았지만 대문 밖에 위치한 단감나무로는 유일한 것이었다.
여름이 끝나고 태풍이 불기 시작하면 특히, 온 동네서 가장 인기있는 나무였다.
태풍에 떨어진 단감을 줍기 위해 사람들은 새벽같이 일어나 찾아오곤 하였다.
태풍에 떨어진 단감이 우리 차지가 된 적이 별로 없었다.
아무리 일찍 일어나 나가봐도 누군가가 우리보다 먼저 다녀간 사람이 있었다.
새벽잠이 없는 아버지는 일찍 일어나도 떨어진 단감을 주워다 주지는 않았다.
전날 밤에 깨워달라고 부탁하면 간혹 새벽에 깨워주긴 하였지만...

단감나무 옆에 골목이 있고, 골목을 돌면 공동우물이 있었다.
우리는 집 안에 우물이 있었기에 사용하지 않는 우물이었다.
집 안에 우물이 없는 윗동네 사람들이 사용하는 우물이었다.
그 우물가에 호두나무가 있었다.
우리는 추자나무라고 불렀는데 역시 태풍이 불면 단감나무만은 못해도 인기 순위 두 번 째는 되는 나무였다.
다른 집은 과일 나무를 대개 집 안에 심었는데 이렇게 우리는 집 밖에 심은 나무들이 많았다.
대문을 왼쪽으로 돌면 은행나무가 있었다.
숫나무라서 은행이 열리진 않았다.
가을이면 노란 단풍이 아름다웠다.
단풍을 주워 모아서 실로 끝을 묶어 장미꽃 모양을 만들어 가지고 놀던 생각이 난다.
은행나무 옆에는 철봉이 있었다.
나는 어렸을 때 철봉이 있는 집은 본 적이 없었다.
학교 운동장에 있는 것처럼 여러 개는 아니고 단 하나였지만...
할아버지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자인 남동생을 위해 만들어 준 것이었다.
남동생은 자기가 친구들 중에서 턱걸이를 제일 잘한다고 우쭐대곤하였다.


은행나무를 지나면 수수감나무가 있었다.
여기서 부터가 텃밭이 시작되는 곳이다.
수수감은 유난히 물이 많고 당도가 높은 감이다.
서울에서는 맛볼 수 없는 감이다.
물이 많고 끝이 뾰족해서 익으면 터지기 쉬워 여러사람의 손을 거쳐 팔려야 하는 감으로는 적당하지 않기 때문이란다.
서리가 내린 후 감을 따서 지붕위에 올려놓고 짚으로 덮어 두었다가 눈내린 겨울 밤에 이불 뒤집어쓰고 꼭지를 입으로 꼭 물어 뜯어낸 후 쪽 빨아먹는 감이었다.

텃밭 가장자리엔 감나무가 여덟 그루, 대추나무 두 그루, 밤나무가 네 그루 서 있었다.
감나무라고, 밤나무라고 다 같은 것이 아니다.
나무마다 종류가 다르고 맛이 달랐다.
가을이면 감나무, 밤나무, 대추나무 밑으로 한 바퀴 돌면 배가 불렀다.
미루나무 여섯그루도 서 있었다.
오월에 새 잎이 필 때 바라보고 있으면 가슴에 그리움 같은 것이 쏴하고 밀려들었다.
오월의 훈풍에 연한 새 이파리들이 반짝이며 내는 소리는 이 세상의 어떤 음악보다 감미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