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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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쉰세대가 아닌 신세대


BY 물안개 2001-11-26

학교에서 책을 만든다고 글을 좀 써오란다.

학교를 다니게된 동기를 써오라고해서 지금까지 쓴글을 편집 했다고나

할까 에세이방에 쓴 글은 요약해서 학교에 갔다내고 나니 뭔가 허전

하고 괜히 냈다싶고 뭐그런 후회가 남습니다.

에세이방님들께도 올리고 싶어서 이렇게.....

제목 : 쉰세대가 아닌 신세대

내가 자랐던 고향 쑥섬은 봄이면 노란 원추리 꽃이 섬 전체에 피고,
여름이면 기암 괴석위에 풍란이 하늘 거리고 갖가지 이름모를 야생화는
아름다운 꽃들을 수줍게 피어 저마다의 자태를 뽐냈다.

고구마를 캘 때쯤이면 주근깨 가득한 개나리가 생글생글 웃으며
우리들을 유혹하고, 겨울이 끝자락에 머물면 붉은 동백꽃이 지천
으로 피어 우리들의 가슴을 활활 타오르게 하였다.

우리들은 타오르는 정열을 이기지 못해 빨래통을 머리에 이고 동네와
떨어진 우물가에 모여 방망이를 두둘기며 장단을 맞추어 노래를 부르곤
하였는데......

그럴때면 육지를 오가는 여객선이 들어오며 유행가를 크게 틀어 놓아
섬 사람들에게 유일한 교통 수단이 왔노라고 으시 대며 풋 처녀들의
마음을 사로 잡아 흔들어 놓았다.

우리들은 빨래를 빨아 바위 위에 널어 놓고 낚시질 하는 풋총각 들에게
가슴속 연정을 숨기고 장난질을 치곤 하였다, 이것도 고기라고 잡았냐?
물속에 놓아 주어라!.....

난 언제나 망망한 바다를 바라보며 책속에서만 보아온 미지의 세계를
꿈꾸었다, 기차는 어떻게 생겼을까?

자동차는 어떻게 가고 전기불은 얼마나 밝을까 아~아 나는 언제쯤이면
저 세계에 가볼수 있을까?

아무리 처다보아도 바다와 갈매기만 보이는 조그만 섬!
국민학교도 배를 타고 2km는 가야하고 중학교는 그보다 더욱 먼곳에
있었다.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내또래 이이들이 아무도 중학교에 가지 않으니 나또한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했다.

하지만 어린 마음이라 그랬는지 배움에 대한 동경심은 그다지 많지 않고 오직
큰 도시로 나가보는 것이 나에겐 더 큰 꿈이었다.

내 나이 열여섯 대든 해 인가 면 소재지에 있는 양장점에 다녔는데 배를타고
출퇴근 하며 ?p 개월 인가를 다니 면서도, 더넓은 도회지로의 꿈을 버리지
못하고 이곳 저곳에 부탁을 하였다.

어느날 친척 소개로 서울에 있는 공장에 취직이 되었다.

드디어 내 소원은 이루어졌고 난 부모 형제 친구들을 떠나는 서운함 보다는
서울로 갈수 있다는 즐거움에 훨훨 날아가는 황홀한 미지의 세계를 꿈꾸었다.

서울에 가면 공장에 다니면서 야간 학교에 다녀야지 그리고 양재 학원에도
다녀서 일류 기술자가 되어 양장점도 차려야지......

그러나 꿈 꾸었던 서울은 17곱 풋 처녀의 황홀한 내 꿈을 앗아가고 있었다.
12시간 2 교대로 일하고나면 자기 바쁘고 자고 나면 일하는 개미가 채바퀴
를 도는 생활이었다.

하지만 내 꿈을 포기하진 않았다, 무슨일이 있어도 양재 학원에 다닐수 있는
돈이 모일때 까지는 공장 생활을 해야지, 언젠가는 내 꿈을 이루고야 말리라,
그렇게 2 년간 일하고 드디어 난 그동안 저축한 돈으로 양재학원에 다녔다.

양재 학원을 졸업할 무렵 난 자칭 일류 기술자였다, 내손으로 옷을 재단해서
만들 수 있다는데에 커다란 자부심을 갖고 이젠 어느 양장점 이든 재단사로
취직할수 있으리라.

그러나 내 자만심은 망상이었다, 학원 출신들을 써주질 않는거였다.
양장점에선 이론을 배운 사람 보단 처음부터 실기를 배운 사람을 쓰고
학원 출신들은 아예 쓸려고를 하지 않았다.

그당시 친척집에 간신히 ?b혀서 학원을 다녔는데 하루 빨리 침식제공
하는곳에 취직해서 신세를 그만 지고 싶었건만 십사리 날써주는 곳은
없었다.

하루에도 수십곳을 찾아 다녔지만 어느 곳에서도 날 써주질 않아 절망
의 끝자락에 서있을 무렵 안양에 있는 양장점에 심부름하는 제자로
취직이 되었다.

우선은 숙식이 해결 되었으니 난 다시 꿈을 꾸기 시작했다.열심히 배워서
양장점을 차려야지,
그렇게 난 양장점 주인이 되기위한 도전을 시작했다.
그야말로 열심히 일을 배우고 노력한 끝에 24살에 양장점 주인이 되었다.

건대 후문에 조그만 내 결실인 양장점을 하면서 난 어떤 남자와 사랑에
빠져 버렸다.
우린 서로 하나 되길 원해 25살에 결혼을 하였는데,결혼을 하고보니 손위
형님들은 영문과와 약대 출신 들이고 심지어 친구 부인들까지 고등학교
이상 졸업한 사람들이었다,

난 그 사람들과 어울리면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내 무식이 탄로 날까봐
그 사람들이 말하면 난 듣기만 하였다.
그런날 보고 형님들은 얌전 하다고 참으로 얌전하다고 하였다,

하지만 내 가슴 저~어 밑 바닥에선 배우지 못한데 대한 후회로 남몰래
가슴 알이를 하였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더욱더 엄마가 무지 하다는 것이 안타 까움으로 다가
왔고 언젠가는 배워야지 꼭 배우고야 말리라.

그러나 배울수 있는 기회가 십사리 와주질 않았다, 남편의 사업 실패로
생활은 어려웠고 아이들은 나날이 성장하고 있었다.

배워야 한다는 생각은 할 겨를도 없이 밤낮으로 일했다, 남편과 함께
음식점을 하며 인권비를 줄이려 혼자서 해보지도 않은 식당일을 해냈다.

어느정도 자리가 잡힐 무렵 우연히 구민일보에 광고 한토막을 보게
되었는데,

주부학생 모집!

내 가슴은 설레 임으로 두근 거리기 시작했다,얼마나 오랬동안 가슴속에
잠재해 있던 배우고 싶은 욕망 이던가!
모든 것이 내 조건에 너무도 잘 맞아 남편에게 동의를 구하고 입학 절차를
밟고 입학식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입학식날 남편에게 입학식에 갔다 오겠다고 했드니 "무슨 입학식"?
남편은 건성으로 듣고 대답을 했는지 갈까 싶어 그랬는지 반대를 하고
있었다.

"누가 못 배웠다고 구박을 했느냐 그나이에 배워서 어디다 쓸려고 그러느냐
가게를 하면서 학교를 어떻게 다니느냐 차라리 수영장에나 다녀라 인제
알파벳 배워서 무얼 하려고 그냥 모른체 살아라 건강하기나 하면 말도
안한다."

난 두시간 동안 울면서 남편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당신은 못 배운 한이
얼마나 큰지 모를 거예요? 가게에 절대 지장이 없도록 하고 하다가 힘들면
그만 두겠으니 내 평생 소원 한번만 들어 주세요"
난 울고 또 울면서 남편에게 매달렸다.

마침내 남편은 아들을 불러 엄마 학교 같이 가봐라 하며 허락 해주었다.
울어서 충혈된 눈 헝클어진 머리 아랑곳 하지 않고 학교로 내달렸다.
혹여라도 늦어서 안된다 할까봐 난 뛰고 있었다.

조용히 뒷자리에 않아 반 배정과 번호를 받고 지정된 교실에 않아 고만
고만한 삶을 살아 온듯한 또래에 아낙들과 눈인사를 하였다.
서로의 살아온 삶을 알고 있다는 듯,
그동안 못배운 한으로 가슴알이 하였을 우리는 서로를 가슴속 으로 보듬어
주고 있었다.
내 나이 48세에 중학 과정 사회 교육원에 입학 한 것이다.

다음해 봄 검정 고시에 합격 하여 당당히 청암 고등학교에 입학 할수
있었다.
지금 난 50살 이지만 학교에선 18세 이다 교과 과목외에 인터넷을 항해
하고, 사군자를 배워 목단을 피워내고, 합창부에 들어 남에게 봉사하고
나에게 이런 행복이 찾아 오리라고 꿈엔들 상상 이나 했겠는가?

난 가끔 수업중에 창밖을 바라본다 어쩌면 단풍이 저리도 고울까,
예전에도 저리 고운색 이었을까?
교정에 소나무도 예쁘고 봄이면 넓은 운동장 울타리에 만개한 장미꽃을
보면 무어라 표현하기 어려운 행복감에 젖는다, 몸은 비록 쉰세대 이지만
마음은 신세대이다.

요즈음 남편은 아침 마다 학교에 태워다 주고 대학도 가란다 학교에 가는
날이면 나보다 먼저 챙기고 시댁에 볼일이 생겨도 자기가 해결 하겠 노라며
학교에 가라고 한다.
모든 것이 청암이 있으므로 찾아온 행복 이리라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