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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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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BY 공주 2001-01-26

직장에서 일이 많았다.
일이 쌓이고 쌓여 점심 시간이 되었지만, 일 속에 있는 나에게 점심 먹으라는 말이 들리지 않았다. 점심 시간을 한 참 넘겨 큰소리로
"나 10분 휴식!"
을 외치고 10분을 멍하니 앉아있었다. 그리고 또 일 속으로 뛰어들었다.
날이 저물고 한참이 되어 계약상 집에 갈 시간이 되었지만, 일은 여전히 내 뒤에 쌓여 있었다. 드디어, 주인도 좀 미안하지 내 눈치를 본다.
문뜩 화가 난다.
마치.
내가 부당하게 부려먹힌다는 생각이 든다.
월급을 올려달라고 해야 하나.
하지만, 주인과 눈이 마주치면 나는 여유롭게 웃는다.
남자도 마찬가지 이겠지만,
백인도 마찬가지 이겠지만,
동양인 여자가 직장을 새로 잡는것은 마찬가지라고 하는 사람들보다 확실히 더 불리하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확실히 더 어렵다. 그래서, 나는 부당하다는 울화가 은근히 치밀어 오르는데, 주인을 보고 웃는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서 이미 머리속이 멍했다.
피곤하다는 증거다.
역시나 언제나 처럼 집은 난장판이였다. 나보다 늦게 출근을 하는 남편을 난 가끔씩 저 인간이 전생에 뱀이 아니였나 의심을 한다. 바닥에 남편이 뱀 허물처럼 몸만 쏙 빠져 나간 옷가지가 놓여 있다. 물론 침대위의 이불도 뒤집어져 있다.
남편의 옷을 집어들고 침대이불을 펴두고.
책상밑의 휴지통에 휴지가 넘쳐 난다. 코트만 벗어두고 휴지통을 비운다. 비워진 휴지통을 제 자리에 놓으려고 하니, 휴지통이 있던 자리에 남편의 손톱이 널비하다.
순간 화가 또 치밀어 오른다.
머리카락 하나 떨어진것도 싫어하는 내 방에 감히 손톱을.
손톱을 치운다.

남편의 퇴근이 늦어진다.
저녁을 한다.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이다. 피곤하다.
그래서 어제는 오뚜기 3분 카레를 먹었고, 오늘은 오뚜기 3분 짜장을 먹는다. 사람들은 나를 사이비 주부라고 부른다.
전기 밥통이 밥을 짓는 동안 점심도 못 먹은 나는 굶주린 강아지처럼 침을 질질 흘리며 애타게 밥을 기다린다.

남편이 온다. 싱글 싱글 웃으며.
나도 생긋 생긋 웃는다. 그래야 행복한 가정으로 보이니까.
손톱에 대해 한마디 하고 싶지만, 꾹 참는다. 나의 하루가 길었듯이 저 남자의 하루도 길었을것이다.

나 먹고 남편을 먹이고.
남편은 다시 컴을 키고 일을 하고 나는 설걷이를 하고.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고 싶다는 마음이 가득한데, 바구니에는 세탁을 기다리는 옷가지들이 산더미. 빨래를 한다.

남편은 테레비를 보고 있다.
리모콘을 빼앗아 내가 보고 싶은 프로를 보고 싶지만, 잠이 밀려온다.

하루.
하루.
또 하루.

근데.
화장실에서 비자금 통장을 보며 진짜로 웃었다. 주인과 남편에게 향한 미소와는 틀린 진짜 미소.
작년 결혼식 이후부터 조금씩 모았다. 내년까지.
내년 엄마 환갑에는 유럽여행을 보내 드릴꺼다.

그래서 행복한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