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얇게 깎아야되요, 이렇게! 꼬달이는 따고 받침은 떼지말고!"
한남자는,
긴머리에 덥수룩한 수염을 한채로 가부좌를 틀고...
또 한남자는,
한쪽다리는 길게 뻗은채로 다리사이에 프라스틱 대야 끼고 앉아서...
두남자의 자세가 카메라 있음 그대로 담고 싶게 재밌다.
푸른잎일땐 안보이던 감나무의 감이,
가을이되어 잎이 단풍져 반쯤 떨어지고,감이 붉게 물드니까
제법 많이 달려 있는걸 보여준다.
난 도무지 긴 대나무 감채가 힘에 부쳐서
다리도 성치않은 그일 꼬드겼다.
"이번달엔 내친구들 놀러 온다는데 곶감 만들었다가 주고 싶어요."
내친구들이라면 꺼뻑하는 그이를 알기에 한번 해봤더니 영락없다.
한낮에 얼굴이 벌개지도록 감을 따놓은거다.
긴나무를 들고 하늘을 쳐다보며 감따는게 보통일이 아닌데
마누라말은 참 잘도 듣는게 고맙다.
따놓은 감 처리를 위해
좀 일찍 저녁을 먹고 아지트에 왔다.
따놓은 감을 깎아야 되니까.
이웃 사시는 최화백님도 밤마실을 오신김에 같이 앉아서...
남자 둘이는 바닥에서,
허리아픈 나는 식탁에서.
가을을 손으로 만지고 있단 생각에 마음이 풍요롭다.
콧노래가 나오고 화가아저씨 따라부르고...
말끔하게 깎인감을 판위에 올려 놓으며 늙을 수록 몸이 고달파 진다는 그이의 말이 귀에 걸린다.
처음이다. 결혼이후.
감을 따다가 주긴 했어도 칼로 감을 깎아주기는...
아끼는 맘이 커진건지 아님, 내몸이 그이에게 이런것을 시킬 정도로 나빠지고 있는건지.
나도모르게 귓속에서 그이의 말을 다시 재생시켜본다.
모든걸 내가 해야 완벽하고 마음이 편해하며 살아온 내가
언젠가부터 내 일을 다른사람에게 조금씩 분담시키고 있는 것이다.
나도 모르게 조금씩...
당연히 그동안 움직이지 않던 사람들이 나로 인해 고달파 지고 있기에 남편도 그걸 얘기 하고 있는 것 이리라.
어른들이 계시는 집에선 쑥스러워서 손하나 까딱 안하는 그이가
아지트에 오면 청소도 서슴찮고 한다.
미덥잖아도 그냥 맡겨 두는 맘이 내게도 생겼는데 그맘이 나도 의심이 간다. 나도 모르는새 내가 게을러 진건가?
옆에 담아낸 포도도 그대로 둔채 열심히 감을 깎으시는 최화백님께, 드시면서 하시래도 일없단다.
열두시가 가까와서야 백개가 넘는 감은, 곶감으로 다시 태어날 준비를 마치고 판위에 가지런히 줄 서 있다.
곱게도 깎아서 껍질이 많지 않다.
교육을 잘 시켰더니만...
친구들이 오면 말리고 있는 땅콩도 주고, 곶감도 주라며
많지도 않은 가을 바구니를 맘껏 부풀리는 그이가 농촌 생활을 본격적으로 해도 저리 재밌어 할려나 염려 스럽다.
곶감을 말리고 햇땅콩를 말리는 내 계절 가을엔,
언제라도 손님이 되어 찾아오는 그 누구에게도
가을이랑 정이랑 듬뿍 안고 가게 해 주고 싶다.
남자들이 켠 곶감 먹고 싶은사람 모이라면 모일까?